서울의 삶 수백 년 지켜본 저 나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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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방학동 은행나무’엔 나라에 큰일이 나기 전 이를 예고라도 하듯 나무에 불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1년 전인 1978년에도 나무에 화재가 발생, 소방차가 출동해 불을 껐다. 서울시 지정 보호수 제1호인 이 나무 주변에는 지난해 7월 정자마당이 조성됐다. 나무를 보호하고 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겠다는 뜻에서다. 나무가 자라는 데 지장을 줄까 봐 주변에 아파트를 지을 때 건물 배치를바꿨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870여 년. 둘레 10.7m에 높이는 25m에 달한다.

서울에서 가장 나이 많은 나무인 방학동 은행나무(사진左)는 870여 년의 세월을 견뎌 왔다. 가회동 느티나무는 수령이 310여 년으로 우람하다. [도봉구·종로구 제공]


수도로서만 6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서울에는 사연을 가진 나무가 많다. 서울시가 보호하고 있는 나무는 210여 그루. 느티나무가 107그루로 가장 많은데, 예부터 마을 어귀마다 ‘수호신’으로 느티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주말에 아이들과 천천히 걸으며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역사 이야기가 나온다.

방학동 은행나무는걸어서 5분 거리에 연산군 묘와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 묘가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다. 정의공주의 묘비는 거북의 아름다운 조각과 어우러진 정인지의 비문으로 유명하다.

인사동이나 삼청동 근처로 나들이를 나섰다면 가회동 느티나무(높이 20m, 둘레 4m)와 인사를 나눠보자. 중앙고 앞에 있는 이 나무는 조선 숙종 때 심은 것으로 수령이 310여 년 됐다. 일제시대 인촌(仁村) 김성수, 고하(古下) 송진우, 기당(幾堂) 현상윤 선생 등이 머리를 맞대며 담론을 나눈 곳이라고 전해진다. 정독도서관 주변에는 보호수가 두 그루 있다. 입구에는 210여 년 된 회화나무(높이 17m, 둘레 2.9m)가 있는데 잔가지가 뻗어나가 이룬 사각의 모양새가 아름답다.

조선 초기 재상인 맹사성이 즐겨 찾았다 해서 ‘맹사성 나무’라는 별칭이 전해진다. 도서관 내 경기고 비석 옆 회화나무도 300년 된 보호수(높이 11m, 둘레 3.6m)다. 인사동, 정독 도서관,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와인바·레스토랑 등 맛집 순례도 하고 호젓하게 산책도 즐겨보자.

주말에 동대문 쇼핑을 즐기는 이들이 찾아볼 만한 것으로 정신여고 옛터에 있는 수령 515년 된 ‘연지동 회화나무’(높이 21m, 둘레 3.9m)가 있다. 두 팔을 활짝 벌린 듯한 품새를 지닌 이 나무는 일제시대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이 주도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지켜줬다. 일본 헌병이 수색할 때 교과서·태극기 등을 보호수의 동공에 숨겼다고 한다. 여름이 되면 푸른 잎이주변을 화려하게 압도한다. 지하철 종로5가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삼양사 정문 앞에 있다.

멀리 나들이 가지 않더라도 동네에서 보호수를 찾아 ‘보물찾기’를 즐겨보자. 관심을 가지고 보면 서민들의 삶을 위로하고 애환을 나눠온 나무가 곳곳에 있다. 홍수 때 사람들을 구했다는 성동구 성수1가동 느티나무, 6·25전쟁 당시 근처로 피신한 민간인을 지켜줬다는 동대문구 전농4동의 물푸레나무, 명성황후가 일본군을 피해 피신하며 기도를 드렸다는 노원구 중계4동 은행나무 등이 있다.

임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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