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습니다] 최은혜 기자의 홍대 앞 입시전문 미술학원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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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3월 11일 홍익대 권명광 총장의 발표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학부모·학원가를 술렁이게 했다. “2013학년도부터 미대 신입생 선발 때 실기고사를 치르지 않겠다”는 내용 때문이다. 홍익대는 실기시험 대신 학생부와 입학사정관 면접, 미술 관련 비교과 활동 등을 반영하겠다는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평가 기준 등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두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미대 진학을 준비하려는 학생과 학부모들은 불안함과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다른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대비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기자가 미대 입시의 중심가 홍대 앞에 위치한 미술학원들을 찾아가 봤다.

‘사고의 전환’ 시험

대부분 학생들이 중간고사가 끝난 후 잠깐의 여유를 맛보고 있었을 8일 금요일 오후. 기자가 찾아간 유명 입시미술 학원 ‘영원한 미소’에서는 고3 학생들이 또다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학원에서 입시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한 번 자체 실시하는 실기 평가였다. 주제는 ‘캔을 이용해 자연 친화적 유기농 마을을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표현력과 함께 창의력을 주로 평가하는 ‘사고의 전환’이라는 시험 방식이었다. 이 반 아이들은 홍익대·숙명여대·성균관대 등 사고의 전환 유형의 실기시험을 채택한 대학을 공통적으로 지망하고 있다.

서장원 강사는 “유형화된 그림이 쏟아지는 것을 탈피하기 위해 2008학년도부터 홍대에서 사고의 전환 시험을 시작했다”며 “실시한 지 두 해 만에 이미 그림 패턴을 암기하는 학생들도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서 강사는 “그러나 창의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험이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쌓고 아이디어 스케치를 통해 다양한 표현 방법을 익히도록 지도한다”고 설명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이 모여드는 홍대 앞 미술학원. 아이들은 방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학원에서 보낸다. 고3들은 이곳에서 한 달에 한 번 실전에 대비한 학원 자체 평가를 치르는 등 소위 ‘입시 그림’을 본격적으로 연습한다. 아이들은 기자에게 “학과 공부와의 병행, 변화하는 입시 제도 등으로 고민도 많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황정옥 기자]

실기 없는 입시 가능할까

전날부터 이어진 시험에서 아이들은 마무리 채색 작업이 한창이었다. 실습실 안에는 물감 냄새와 함께 적막함이 가득했다. 오샛별(예일여고3)양에게 “미대 입시 준비를 언제부터 했느냐”고 묻자 “2학년 들어서부터”라고 했다. 오양은 “요즘은 거의 고2 때부터 시작해 1~2년 정도 학원을 다니면서 실기를 준비한 뒤 입시를 치른다”고 설명했다. ‘예체능을 하는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재능을 발견해 진로를 정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기자에게는 생각보다 짧은 기간이었다.

최근 홍대가 발표한 입시안에 따라 준비 방향을 바꾸는 아이들은 없을까. 최지원(동명여고3)양은 “별로 관심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당장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이 전형을 준비해서 합격을 바라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홍익대는 올해 자율전공 정원 100명에 한해 무실기로 선발할 계획이다. 2013학년도까지 이를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최양은 “미대생을 실기 없이 뽑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실기 준비도) 디자인의 기본을 익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서 강사는 “홍대 자율전공의 경우 수능 등급 커트라인이 높기 때문에 그동안 실기를 준비해온 대다수 학생들에게는 도전하기 어려운 전형”이라고 전했다. 또 많은 학생들이 수능 시험을 치른 뒤에야 성적에 따라 자신이 공략할 전형을 구체적으로 정한다는 것. 지금으로선 학생들의 반응이 잠잠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서 강사는 “다만 내년에 들어올 고1 신입 원생의 수가 어떻게 변화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입시 속의 입시, 미대 입시

또 다른 강의실에서는 고1~2학년 학생들이 듣는 예비반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 ‘벌레 로봇’을 그린 우수작을 보며 따라 그리고 있었다. 강지혜 강사는 “몸의 마디 구조에 대해 배우고 관찰력을 기르기 위한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슥삭슥삭 연필을 움직이는 손놀림이 분주하다. 벽마다 빼곡히 붙은 우수 작품들이 화려했다. 그때 조동현(서울디자인고2)군이 뒤늦게 수업에 들어왔다. 조군은 “국어 과외 수업 받고 오느라 늦었다”며 머쓱해했다. 미대를 준비하는 고1, 2학년 학생들은 대부분 입시에 반영되는 수능 영역인 언어·외국어 영역을 따로 공부하고 있었다.

미술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묻자 아이들은 “실기 준비와 수능 공부의 병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중3 때부터 미술을 배웠다는 이유나(금옥여고2)양도 “주 5일 미술학원에서 실기를 연습하고 주말에는 국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이 힘들고 싫지 않을까. 기자의 질문에 아이들은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낫다”며 웃었다. 구서윤(관악고1)양은 “미술은 정말 좋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공부 스트레스의 해방구가 된다”고 덧붙였다. 구양은 “홍대 입시안이 발표된 뒤 다니던 미술학원을 그만둔 친구가 있다”며 “솔직히 (그 친구가) 미술에 대한 꿈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대학 움직임 주시

미대로 가는 문을 두드리려는 학생·학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뭘까. 이오복 원장은 “원하는 대학의 실기·수능 합격 가능 수준”이라고 답했다. 또 대학별로 선호하는 그림 스타일 등 입시 정보에 대한 질문도 자주 받는다. 이 원장은 “보통 입시 실기 경력이 2년 정도 되면서 인 서울(서울시 소재 대학)은 수능 평균 4등급, 국민대·홍대 등 상위 대학은 2~2.5 등급, 서울대는 1등급을 받아야 합격이 무난한 것으로 본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그는 “인문계와 달리 실기 실력에 따라 교과 성적의 분포가 다양해 커트라인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며 “미대는 결국 실기를 잘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예중·예고 입시를 전문으로 하는 인근의 한 학원도 찾아가 봤다. 오후 9시가 넘었는데도 초등·중학생 아이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실기 연습에 한창이었다. 원장 김모씨는 “원생 학부모들이 홍대 발표에 대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오기도 한다”며 “구체적인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딱히 답해줄 말이 없어 난감하다”고 밝혔다.

그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지만 꾸준히 걸려오던 상담 문의 전화가 홍대 발표 이후 뚝 끊겼다”고 털어놨다. 이어 “2005년에도 유예 기간 없이 하루아침에 편입학 전형을 없애 준비생들을 절망시키더니 홍대가 또다시 수험생들을 당혹시킬까 걱정”이라고 개탄했다.

오후 10시가 되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연습을 더 하고자 하는 학생은 자정까지 남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미대 입시 학원가의 모습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차분했다. 홍대의 ‘무실기 전형’ 발표로 한때 들썩였던 분위기도 관망하는 자세로 돌아온 듯했다. “국민대·건국대 등 타 명문 미대들이 홍대의 길을 따라가리라고 보지는 않지만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면 미술학원은 죽을지 몰라도 교과 학원은 더 불이 붙을 것” “미술과 관련한 오랜 경력을 쌓기 위해 입시 연령층만 낮아질 것”이란 예측도 있었다.

학원들은 늦은 밤까지 훤하게 불을 밝혔다. 과거와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실기에 매달리는 학생들도 그냥 묵묵했다.

최은혜 기자 , 사진=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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