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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데이트] 선수로, 감독으로 챔프 오른 허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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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거실 탁자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평전이 놓여 있었다. 농구 선수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오바마의 책이 ‘농구 대통령’의 집에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현역 시절 받은 각종 트로피와 메달로 장식된 거실 진열장 앞에 나란히 선 허재 감독 가족. 왼쪽부터 부인 이미수씨, 큰아들 웅이, 허 감독, 작은아들 훈이. [김경빈 기자]


허재 감독은 요즘 시즌 중보다 더 바쁘다. 각종 수상식과 회사 축승회 등 우승 행사에 파김치 상태다. 전날 홈인 전주에서 밤늦게까지 팬 사인회를 하고 이날 아침 집에 들어온 그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스포츠 영재를 키우는 엄마의 101가지 방법』이었다.

허 감독의 두 아들은 농구 선수다. 둘 다 아버지처럼 가드며, 아버지가 다니던 학교를 다니고 있다. 큰아들 허웅(16)은 용산고 1학년이고, 막내 허훈(14)은 용산중 2학년이다. 허재 주니어들은 일급 선수로 꼽힌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만큼 뛰어난 것은 아니다. 허재는 용산중 2학년부터 중앙대를 졸업할 때까지 항상 주전으로 뛰었고 동급 학교와의 경기에서 진 적이 없다. 대학 시절 농구대잔치에서 현대나 삼성 같은 실업팀들에 몇 번 졌을 뿐이다. 아직 저학년인 허재의 두 아들은 경기에 못 나가기도 한다. 허 감독은 “그래도 큰아들은 농구를 늦게 시작한 것에 비하면 빨리 배우고, 작은아들은 재간이 많다고 하더라”고 치켜세웠다.

부인 이미수(43)씨도 “합숙이 없는 비시즌에는 항상 집에 들어오고, 운동할 때를 제외하면 아이들에게 매우 자상하다”고 남편을 칭찬했다. 미술을 전공한 부인도 허 감독의 흰머리와 함께 억세졌다. “아이들에게 철마다 뱀에 말고기 같은 걸 먹여요. 신혼 때는 남편이 뱀을 많이 먹었다고 해서 자는 모습을 보면 구렁이 한 마리가 누워 있는 것처럼 징그럽기도 했는데, 아이 키우려니까 나도 똑같이 변해버렸네요”라며 웃었다.

허재 주니어들에겐 아버지의 등 번호인 9번도 소중하다. 웅이는 지난해까지 용산중에서 9번을 달다가 졸업하면서 동생에게 번호를 물려줬다. 웅이는 “지금은 1학년이라 원하는 번호를 달 수 없지만 2학년이 되면 9번을 다시 달겠다”고 말했다.

큰아들은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가 아버지를 뺐다. 큰 눈에 쌍꺼풀이 있는 작은아들은 엄마를 더 닮았다. 네 식구 중 가장 키가 작은 엄마 이씨는 “아이들이 아빠를 닮아 키가 빨리 더 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큰아들 웅이는 “아버지 때문에 자부심도 크지만 부담도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농구 대통령이라고도 하니까….”

“농구 대통령이 누군데?” 작은아들이 끼어들었다. 아직 어린 훈이는 농구 선수로서의 아버지를 잘 모른다. “아버지 경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라고 말하는 막내의 말에 허 감독은 그냥 씩 웃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수많은 트로피 중 1998년 챔피언 결정전 MVP 트로피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 허재는 부러진 손가락과 뒤틀린 허리로 외국인 선수가 한 명밖에 뛰지 못한 기아를 챔프전 7차전까지 끌고 갔다.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사상 유일하게 패배한 팀에서 나온 MVP가 될 정도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허 감독이 30년 현역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들은 진 경기다. 패배를 용납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허 감독은 “진 경기 중에서도 중국과의 경기를 가장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합숙 도중 음주 사건 등으로 대표팀에서 자격정지를 당하기도 했던 그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의외다.

허 감독은 “태릉에서 합숙할 때 반드시 대표팀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고, 최근 대표팀 감독에 선발됐을 때 가슴이 뛰었다”고 말했다. 장난꾸러기 둘째가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그의 말은 진지했다.

험난했던 이번 시즌처럼 대표팀 감독도 가시밭길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전력상 중국을 이기기는 힘들고, 프로 선수들은 부상 등을 걱정해 대표팀 차출을 꺼리기 때문이다. 하승진·김주성·방성윤·김승현 등 주력 선수들은 모두 다쳐 제 기량을 발휘하기 힘들다. 이씨는 “시즌 중 그렇게 고생했는데 8월까지 또 그 고생을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허 감독은 “이번 시즌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유)재학이 형은 조직력이 좋고, (전)창진이 형은 팀 분위기를 잘 끌어간다. 그런 장점들을….” 그러자 옆에 있던 훈이가 “그럼, 아빠는 그냥 스파르타식이야?”라고 말했다. “요녀석.” 혼을 내는 엄마에게 훈이는 “릴랙스! OK?” 하며 쪼르르 도망갔다.

성호준 기자 ,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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