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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들 무슨 소용인가 돈이 많아도, 즐길 시간이 없다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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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11면

1 나무 열매를 쌓아놓고 던져 맞히는 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들 2 치몽에 머무를 때 방문했던 가정에서 만난 형제들

질문 4. 열심히 일하면 행복해질까?
치몽 못지않은 오지 마을에 직메라는 소년이 있었다. 소 치며 풀피리 제법 불던 이 소년, 개천에서 난 용이라 수도 팀부로 유학을 갔다. 고등학교 시절, 어렵게 카세트 테이프 리코더를 하나 샀다. 밤마다 기타를 치며 자기가 만든 노래들을 녹음했다. 앞집에서 애가 울면 그치기를 기다렸다 녹음, 뒷집에서 개가 울면 두들겨 팬 후에 또 녹음. 그런 식으로 테이프 100개를 만들어 학교에서 팔았던 소년은 부탄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소 치던 시절 피리 불며 혼자 놀던 그 가락으로. 2008년 치러진 부탄 최초의 총선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던 이 남자, 유세장에서도 연설보다 노래를 더 즐겨 했다나.

여행가 김남희, 부탄에서 행복의 의미를 묻다<下>

부탄 사람들은 놀 줄 안다. 치몽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머무르는 동안 패마의 집 마당에는 밤마다 모닥불이 타올랐다. 그 모닥불 앞으로 마을 처녀·총각들이 모여들었다. 명목은 물론 우리들을 위한 위문 공연. 하지만 졸음을 못 이긴 우리가 퇴청한 야심한 밤에도 가무는 그칠 줄 몰랐다. 근사한 반주 없이도 그들의 노래는 절창이었고, 화려한 조명이 없이도 춤사위는 흥겨웠다.

치몽에서는 모두가 열심히 놀았다. 여자들도, 남자들도 직접 담근 막걸리 방창을 마시며 몇 시간쯤은 가뿐하게 수다를 떨었다. 활쏘기를 하거나 다트 게임을 하며 노는 청년들의 함성으로 들판은 늘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치기며 제기 차기, 굴렁쇠 놀이를 하며 동네를 휘저었다. 초가지붕 엮는 일을 구경하던 날, 남자들의 표정이 어찌나 환하던지, 몸동작은 또 얼마나 날렵하던지, 보는 내가 다 신이 날 정도였다.

3 붐탕의 사원. 동자승이 차 주전자를 들고 사원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있다

이 나라에서 삶은 그야말로 사는 것이다. TV로 보고, 인터넷으로 서핑하고, 카메라로 찍는 삶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직접 창조하고, 경험하는 삶이다. 부탄에서 일과 놀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노는 듯 일하고, 일하듯 논다. 진정한 호모 루덴스였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 노동하기 위해 살고 있지는 않다. 그들에게 놀이는 돈을 지불하고 사야만 하는 상품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과 놀이는 분리되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스포츠를 즐기기보다는 ‘관람’하게 되었고, 휴가는 돈을 주고 구입해야만 하는 상품이 되어 버렸다. 놀이를 구매하기 위해 더 오래, 더 경쟁적으로 일하는 동안 결국 우리는 노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니체가 지적했듯 결국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박탈당했고, 매일 사용되어 닳아지는 것이 되도록 교육받았으며 그것을 의무로 받아들이게 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 방향조차 모른 채 자신의 영혼을 훼손당하면서 일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게으르게 소요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걸 죄악시 여기는 사회를 만들었다. 일본에는 ‘틈새 증후군’이라는 병이 있다고 한다. 스케줄러의 예정표가 꽉꽉 채워져 있지 않으면 불안해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는 병. 신이치 선생님은 그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 일본 사회를 향한 유쾌한 전복 사례를 소개했다. 바로 홋카이도의 정신장애우 공동체 ‘베델의 집’이다. 놀이하듯 일하는 그곳은 하강지향을 추구한다. ‘열심히 하지 않기’ ‘중간에 그만둘 줄 아는 미덕’ ‘자신의 약점 드러내기’ ‘안심하고 땡땡이 칠 수 있는 회사’ 등이 그곳의 키워드다. 듣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번지는 상식의 반전이다. 선생님이 들려준 에도 시대의 일화 하나.

노인: 힘도 좋은 청년이 일도 하지 않고 왜 그리 빈둥대고만 있나?
청년: 일을 하면 뭐가 좋습니까?
노인: 일을 하면 돈을 받지 않는가?
청년: 돈을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노인: 부자가 되지.
청년: 부자가 되면 뭐가 좋은가요?
노인: 부자가 되면, 음…유유자적하며 살 수 있지 않은가.
청년: 네? 그런 거라면, 저는 이미 하고 있는데요.

일의 내용을 상관하지 않고, 일의 목표를 묻지 않고 일 자체가 절대가치가 되어 버린 우리들의 시대. ‘한눈팔기’ ‘딴청 피우기’ ‘빈둥거리기’ 같은 게으름의 가치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우리의 친구 패마는 이렇게 말했다. “돈은 손에 묻은 먼지와 같아서 생겼다가도 없어지는 거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인생을 즐길 시간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질문 5. 개발하면 행복해질까?
치몽으로 가는 길목에 ‘피그턴(pig turn)’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지루할 정도로 긴 지그재그 길이었다. 인도인이 이곳에 도로를 건설하고 있던 1970년대의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제발 우리 마을 앞으로 도로를 놓지 말아주세요.” 그들이 애원하며 내놓은 뇌물이 바로 돼지 한 마리. 공사감독은 돼지에 넘어갔다. 덕분에 지름길을 두고 16번의 턴을 해야 하는 지독한 지그재그 도로가 건설됐다. 마을 사람들이 도로를 거부한 건 땅을 오염시키고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란다.

치몽은 생태계가 잘 보존된 곳이다. 도로도, 전기도 없는 이 마을에는 깨끗한 물과 흙이 살아 있다. 이 마을에서는 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을 자급자족한다. 치몽에서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집을 짓거나 물을 끌어오고 농산물을 수확하는 모든 일이 품앗이로 행해진다. 그래서 공동체가 살아 있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서로의 역할이 존중받는다. 오랜 전통과 고유의 문화는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머지않아 치몽에도 도로가 놓일 것이고, 뒤이어 전기도 들어올 것이다. 도로와 전기의 보급은 이들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지금까지의 자급자족 구조에서 벗어난 의존이 시작되지 않을까. 밥솥이 필요하고, TV가 갖고 싶고, 세탁기가 탐나기 시작하면 돈이 필요해지고, 결국 지금과는 다른 일을 찾아 돈을 벌게 될지 모른다.

개발을 통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자 행복의 기초조건으로 여겨져 왔다. 맹목적인 신앙이었던 개발 정책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개발이 진행될수록 세계는 물론 인간도 황폐해져 갔다. 먼저 자연이 파괴되고 곧이어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단어가 말해 준다. 이제까지의 개발이 지속 불가능한 개발이었음을.

신이치 선생님이 지적하듯이 ‘이걸로 충분하다’는 도달 목표를 설정하는 대신 ‘경제가 성장한다’는 진행형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환경파괴는 개발과 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우리는 결국 머지않아 완전히 사막화된 자연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게 될 것이다. 대지는 우리가 지닐 자부심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부탄은 깨끗한 물과 공기, 병들지 않은 대지와 같은 자연환경의 보호를 행복의 기본 조건으로 믿고 있다. 이 나라가 관광객을 1년에 1만 명으로 제한하는 것도 무분별한 환경파괴를 막겠다는 의지다. 그래서 부탄은 개발 파트너를 선택하는 데도 신중하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만난 부탄 사람들은 “한국이나 일본처럼 개발의 대가로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나라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이 나라의 불교적 생태주의는 아직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이 나라에서 교육과 의료는 무상이다. 외국 유학도 나라에서 다 보내준다. 그렇게 외국에서 공부한 부탄 사람들의 90%가 부탄으로 돌아온다. 고소득의 직장과 물질적으로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로.

“이곳 사람들이 전통적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도로나 전기를 거부해야 할까요?”라는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중요한 건 거부하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걸 긍정하는 힘이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가는 한 개발의 폐해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질문6. 과학기술이 행복을 가져다 줄까?
부탄에서는 시간의 그물코가 얽혀 있다. 이곳에서는 현재와 과거가, 이승과 저승이, 전생과 후생이 뒤섞여 있다. 그것도 제법 자연스럽게. 이 나라 사람들은 내세를 믿고, 윤회를 믿는다. 누구나 다음 생에서 개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길거리의 개들도 건드리지 않는다. 파리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고기를 먹긴 하지만 동물을 도축하는 푸줏간은 나라 전역에 한 곳도 없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이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기에 언제 태어났는지, 몇 살인지는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생일도 축하하지 않는다. 패마의 생일을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랬다. “오렌지 철에 태어났으니 10월에서 11월 사이지.” 심지어 그의 부모님은 패마가 태어난 해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이 나라에는 신화와 전설이 살아 있다. 부탄의 가정집엔 외벽마다 남성의 성기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포’라고 불리는 이 성기는 그림과 조각과 장신구의 형태로 온 나라를 덮고 있다. ‘포’가 악귀를 쫓아준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부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인 중에 ‘신성한 광인’이라 불리는 드룩파 컨리가 있다. 그는 감정이나 욕망을 억압하지 말고 정화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자신의 명상법이 여자와 술이라고 스스로 노래했던 그는 악귀를 물리칠 때 자신의 성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부탄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영적인 힘을 믿는다. ‘신성한 광인’이 세운 절 치미라캉은 부탄 전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곳에 모셔진 ‘포’로 축복을 받으면 아이를 갖게 된다고 부탄 사람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다.

치몽을 떠난 후 두 번째로 찾아갔던 마을 불리. 이틀간 우리를 재워 준 민가의 안주인 핀추 왕모는 가족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큰아들이 환생승이에요. 전생에 유명한 고승이었지요.” 옆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핀추의 아들이 환생승인 건 그녀가 전생에 쌓은 선업 덕분이지요.”

그 마을에 머무는 동안 마을 여자들과 ‘신성한 호수’로 소풍을 갔다. 주니라는 여자가 호수에서의 모든 제사를 관장했다. 이유는 호수의 여신이 선택한 거주지가 그녀의 집이기 때문이란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진지한 눈빛으로 하는 부탄 사람들을 대할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화가 살아 있어 삶은 더 풍요롭게 보였다.

부탄에도 인터넷이 있고 아리랑 TV와 CNN이 나오는 위성 텔레비전이 있다. 그런데도 수도를 벗어나 몇십㎞만 달리면 세상의 끝에 다다른 기분을 준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편안하고 별걱정이 없어 보여서일까. 선생님 말씀처럼 농사를 짓고 있어서 사람들이 작물의 시간을 함께 살아내기 때문일까. 그냥 이대로 평생을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긋함이 번져 온다. 이 나라에는 정신병도 없고-나라 전체에 정신과 의사는 딱 한 명- 강력범죄의 발생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다.

과학기술의 기계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세계관을 대신하는 신화와 상상력이 부탄에는 펄펄 뛰며 살아 있다. 과학기술의 속도와 힘은 우리의 몸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지는 몰라도 정신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닐까. 우리는 일을 더 빨리 해 주거나 대신 해 주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늘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기계가 아닌 몸을 써서 수많은 일을 해야만 하는 이 동네 사람들이 ‘바빠 죽겠다’거나,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듣지 못했다. 더 많은 것, 더 빠른 것, 더 큰 것, 더 좋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늘 ‘현재’를 저당 잡히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김남희(38)씨는 주한 터키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어느 날 넓은 세상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전세 빼고 적금 깨서 여행길에 올랐다. 저서로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시리즈와 『유럽의 걷고 싶은 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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