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3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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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그러나 한철규가 한 잔을 마실 동안, 변씨는 석 잔을 들이키는 폭이었다.

그리고 시리디 시린 바람벽에 등을 기대고 코를 곯았다.

한철규는 잠들어 있는 변씨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의 심층 밑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어두움의 진상들이 억병으로 취하도록 내버려둔 방만의 육체에 촘촘하게 들어와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루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어둠이 깔리면, 술이란 계략으로 가슴 속에 모닥불 같이 피어나는 신산스런 삶의 이력들을 애써 지워보려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는 언제나 능숙하게 그 의지를 가차없이 따돌리고 그를 점령해버리는 것 같았다.

한철규는 변씨를 방바닥으로 끌어당겨 눕힌 다음, 고린내가 등천하는 홑이불 자락을 덮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누웠다.

그 순간 변씨는 눈도 뜨지 않은 채 그의 목덜미를 끌어 안고 입을 쩍 맞추었다.

그토록 누추한 잠자리에서도 잠꼬대는 여전했다.

횡계천 계곡을 할퀴고 지나는 매몰찬 삭풍이 아무 거리낌없이 문틈과 벽 사이로 새어들어 콧등을 스치고 지났다.

이튿날, 그들은 해장국 한 그릇으로 뒤틀리고 얼어붙은 내장을 얼추 달랜 다음, 강릉으로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강릉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지루한 북상을 계속해 속초에서 차를 내려 다시 미시령을 넘어 진부령에 닿았다.

강릉에서 북상하던 도중 주문진에서 차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려 했을 때부터, 변씨는 눈에 띄게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탐탁잖아 했다.

그러나 이번엔 한철규가 진부령의 황태덕장까지 가보자고 고집을 부렸다.

기왕에 덕장구경을 나선 바에는 미진함이 남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고집을 부린 까닭에는 승희를 만나게 됨으로써 곱다시 감내해야 할 계면쩍음을 시간으로 희석하자는 속셈도 없지 않았다.

미시령을 넘어 간성과 원통으로 갈라지는 진부령 삼거리에 당도한 것은 해가 나절가웃으로 기울 무렵이었다.

황태생산의 8할을 감당하고 있는 30여군데의 덕장은 북쪽의 진부천과 남쪽의 백담계곡 초입에 자리잡은 설원지대였다.

그들 덕장에서 매년 1천만마리 이상의 황태가 건조되고 있었다.

백담사 계곡 초입의 왼편 개활지를 메운 눈덮인 용대리 덕장은 해질 무렵인데도,가슴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를 신은 인부들이 마침 트럭에 실려온 명태를 하역하느라 불알에서 요령소리가 나도록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릉을 이룬 개활지 위로 늘어선 덕대에 주렁주렁 매달린 명태들은 꽁꽁 얼어붙어 차렷 자세로 도열한 병사들과 흡사했다.

포구에 어선이 닿으면, 먼저 상자에 담겨진 명태들이 하역된다.

그 명태의 배를 따고 내장과 명란을 분리하는 작업은, 겨우내 갯가의 찬바람을 이겨내며 살아온 아녀자들의 차지였다.

한 개의 상자에는 얼추 30마리 내외의 명태가 들어 있지만, 배를 따주고 받는 삯전은 한 상자에 2천원에 불과했다.

그 하찮은 노임을 겨냥하고 상자를 차지하려는 아녀자들의 북새통으로 어판장이 난장판 될 때가 허다하다.

그러나 10마리에 4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근해의 토종명태가 하역되는 날엔 포구는 자못 활기를 띠게 된다.

토종명태는 원양태보다 몸통도 빈약하고 크기도 작지만, 입은 원양태보다 크다.

작아도 알이 밴 명태가 많기 때문에 배를 따는 작업도 수입이 쏠쏠하다.

“덕장에 걸려 있는 명태들의 소유주는 선주 (船主) 들이나 건어물 도매상들이오. 건조만 해주고 노임만 따먹는 덕장주들도 있지만, 덕장주들이 주인인 경우도 없지는 않아. 선원들은 자기가 잡은 생선 판매대금에서 2할을 선주에게 바쳐야 돼. 헌데, 한 드럼에 3만원 하던 기름값이 요사이 와선 세배가 올라버렸어. 출어를 하면, 통당통당하는 엔진소리가 내가 듣기에는 돈 나간다 돈 나간다 하는 것 같어. 그뿐인줄 아시오? 알애이 (엘니뇨현상) 때문에 차운 바다에 산다는 명태는 어느새 씨가 말라버렸고, 더운 바다에 산다는 문어만 간혹 잡히지. 내년에는 북어값이 엄청나게 뛰어서 천세가 날 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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