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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쟁의에도 노조 전임자에게 민·형사 책임 못 물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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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가스공사는 조합원이 순직하거나 업무상 이유로 부상을 입어 퇴직할 경우 배우자나 자녀 한 명을 특별 채용하는 제도가 있다. 20년 넘게 단체협약에 따라 직원들이 보장받고 있는 권리다. 한국소비자원은 직원들이 업무시간 중에 공부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도 된다. 일주일에 이틀, 8시간 한도 내에서 업무시간 중에 학교에 가도 된다고 노사가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 노조가 지나칠 정도의 특혜를 누려온 사실이 확인됐다. 단체협약을 통해 과도한 복지 혜택은 물론 채용과 승진 등 인사·경영권에도 간여해온 것이다. 안정된 신분과 높은 연봉뿐 아니라 직원들의 권리까지도 ‘신의 직장’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민간 기업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이 같은 혜택은 최근 공공기관 경영정보시스템(www.alio.go.kr)을 통해 노사 단체협약이 공시되면서 드러났다.

◆임원 빼곤 대부분 노조원=공공기관 노조의 힘은 민간 기업에 비해 월등히 높은 노조 가입률에서 나온다. 공공기관의 노조 조직률은 65.8%로 민간 기업(10.6%)의 여섯 배가 넘었다. 특히 회사 규모가 큰 공기업의 경우 81.8%로 나타났다. 임원과 일부 보직간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조합원인 셈이다. 상당수 공공기관이 3급(차장급)까지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있다. 한전·대한석탄공사·한국공항공사·대한주택보증 등에선 인사·감사·노무 담당 직원들까지 노조에 가입할 수 있다. 이런 업무는 사용자 측을 대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민간 기업에서는 가입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사·채용·징계에도 개입=공공기관 노조들은 경영진의 고유 권한에 개입해 왔다. 대부분의 공공기관 단체협약에는 ‘조합원에 대한 인사결정 방침과 기준을 정해 사전에 조합과 합의해 시행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인사·경영권이 노조에 양도된 것으로 봐야 할 정도의 내용”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지역난방공사와 부산항만공사 등 대다수 공기업은 구조조정을 사전에 차단하는 조항을 만들어둔 상태다. 감원 계획을 60일 전에 조합에 통보하고 합의를 하도록 하는가 하면 정리해고는 2년 전에 합의를 해야 가능한 곳도 있었다. 도로공사와 조폐공사·토지공사는 특정 직급 이상의 채용을 금지하고, 채용 때는 노조와 합의토록 했다. 감원을 막는 것으로 부족해 노조가 채용에도 개입하는 것이다. 한국공항공사나 한국발전산업 노조는 조합 일에 반대하는 비조합원에 대해 징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 가스공사의 경우 쟁의 때 불법행위가 있어도 노조 전임자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복지혜택 최상급=노조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직원들의 근로조건은 민간 기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았다. 예를 들어 산업연구원과 노동연구원·철도공사의 경우 정규 근로시간을 법정 근로시간(월 209시간)보다 훨씬 적은 월 174~184시간으로 정했다. 이 시간을 넘어 근무하면 각종 초과근무 수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조세연구원의 경우 업무상 질병이나 부상이 아닌 사유로 휴직해도 월급을 받도록 했다. 산업은행은 국내 학교에 재학 중인 자녀뿐 아니라 해외에 유학 중인 자녀의 학자금까지 100% 지원해 주고 있다. 의료비도 연간 1000만원까지 보조해 준다. 수출입은행은 연간 500만원 한도 내에서 보철과 틀니 비용까지 지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민간 기업들은 노와 사가 균형을 이뤄 단체협약을 맺지만 공공기관은 주인이 없다 보니 터무니없이 노조 측에 유리한 조항이 체결된다”고 지적했다. 한성대 박영범(경제학) 교수는 “현재의 단체협약은 대부분 전임 기관장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며 “지난 정권의 특성상 문제가 있는 단협을 눈감아준 것 같다”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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