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 시론 ④·끝

수사 결과 자신 있으면 구속영장 청구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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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소 및 구속 여부에 대한 논란이 탁상공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 혐의가 검찰에 의해 얼마나 입증되었는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의 주장처럼 문제의 600만 달러에 대해 최근에야 알았다면, 도덕적 파산에 그치고 사법적 책임은 면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보도를 종합해보면 검찰은 상당한 정도의 혐의 입증을 자신하고 있는데, 보통의 상식으로 접근해 보아도 노 전 대통령의 ‘모르쇠’는 납득하기 어렵다.

노 전 대통령이 제시하는 시나리오는 부인, 아들, 조카, 최측근 비서관이 비밀리에 공모해 감히 ‘대통령 속이기’에 나섰다는 것인데, 적어도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의 가담은 믿을 수가 없다. 청년기에 고시 공부를 하다 만나 청와대행까지 함께한 이런 관계는 서로 비밀이 없는 정보의 철저한 공유가 그 속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의 ‘대통령 속이기’가 성공하려면 돈을 준 박연차 회장의 입단속도 필수적인데, 그런 시도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 측은 검찰에 증거를 제시하라고 압박하는데 오히려 정 전 비서관이 박 회장에게 “이 돈은 대통령에게는 나중에 천천히 보고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거나, 노 전 대통령이 아닌 권양숙 여사가 박 회장에게 감사의 전화를 했다거나 등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갖고 있어야 맞다. 표면상 권 여사 등이 600만 달러의 수수를 주도했더라도 대통령 속이기 같은 프로젝트는 결코 성공할 수도 없고, 아예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검찰이 수사 결과에 대해 자신이 있다면, 기소는 당연하고 구속영장도 청구해야 한다. 이미 검찰 수뇌부에서는 불구속 기소 카드를 쥐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는데, 그 고뇌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일관성과 원칙의 견지가 중요하다.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 이미 구속된 정치인들과 노 전 대통령이 달리 취급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이기에 과거 통치행위에 대해서는 ‘잘 해보려고 했다’는 주관적 의지에 대해 믿음을 갖고 관용과 예의를 잃지 않아야겠지만, 뇌물죄의 처리는 더욱 엄중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이 호형호제하며 후보 시절부터 돕던 박 회장의 돈에 대해 대가 없는 후원금으로 편리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박 회장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라 검은돈으로 사업상 특혜를 받아 온 기업가다. 노 전 대통령의 안이한 처신은 박 회장이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노 전 대통령 측근들에게 뇌물을 뿌려대는 치명적 환경을 조성하였으니, 박연차 게이트의 몸통이 아닐 수 없다. 몸통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형평성을 생명으로 하는 법치주의의 우롱이며 차라리 강자에 대한 굴종이다.

주변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의외로 관심이 없다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노 전 대통령의 행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마치 준조세처럼 기업의 규모에 따라 돈을 걷은 것과 비교해도 뇌물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하며, 그 액수는 더 적지만 대통령의 청렴에 대한 기대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진 시대 변화를 생각하면 몇 배의 가중치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노 전 대통령 불구속이나 불기소론 등은 그 유죄를 전제하면서도 법의 테두리를 넘어 큰 틀에서 사회적 안정과 한국의 품격을 지키자는 취지로 이해된다. 법도 사람이 만든 것으로 절대화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합의를 통해 범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자는 접근은 먼 미래에 인간 사회가 더 고도화되었을 때나 생각해 볼 이상주의로 들린다. 현자(賢子)의 눈으로는 최선이 아닐지 모르지만, 사회가 이미 약속한 시스템을 가동해 결론을 내리는 것이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더 유리하다고 확신한다. 그에 따르는 갈등이나 혼란은 정면으로 겪으면서 우리의 수준도 확인하고 배울 것도 찾아야 한다.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