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가장의 짐 나눠서 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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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실직한 가장들이 잇따라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IMF사태 한달여 만에 하루평균 5천명씩 실업자가 늘고있다는데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음의 유혹' 과 맞닥뜨리게 될까. 비감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설날 선물과 같은 외채협상 타결로 한숨 돌리게는 됐다지만 사실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급속한 산업구조조정을 거쳤던 멕시코.영국.미국의 예를 보더라도 대량실업이 진행되면서 궁지에 몰린 이들이 갖가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금융위기가 시작된 태국에선 방콕 시민의 17%가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실직이 몰고올 충격과 파장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오로지 가장 한 사람에게만 매달려온 가계의 소득구조 때문이다.

맞벌이가 늘었다지만 여전히 4집 가운데 3집은 가장 혼자 돈을 번다.

그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가장이 일자리를 잃었을 때 본인은 물론 식구들이 느낄 좌절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업재원을 확충한다, 취업재교육을 활성화한다며 국가에서도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개개 가정에서 발상의 대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기자는 믿는다.

가구당 취업자가 선진국은 2~3명에 달하는 반면 우리는 1.4명에 불과하다.

가장이 실직했다 해서 넋놓고 원망만 할 게 아니라 가족 중 누구라도 돈벌이에 나서야 한다.

가족 부양의 짐을 가장의 어깨에서 끌어내려 아내와 장성한 자녀들이 나눠 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역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내일을 도모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최근 각종 상담소에 접수된 사례 중엔 자신이 일자리를 잃은 뒤 아내가 파출부 등 막일에 나서자 자괴감으로 과음과 폭행을 일삼아 가정의 불행을 가중시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최근 젊은 부부들 중에는 이른바 '포트폴리오 부부' 가 늘고 있다.

원래 포트폴리오란 위험을 최소화하기위해 주식을 분산투자한다는 말. 이들 부부는 아내나 남편 둘 중 하나는 봉급생활자로 남아 식구들을 먹여살리면서 나머지 한 사람에겐 취업이 수월한 자격증 준비를 시킨다는 것이다.

일찌감치 가장에 대한 발상을 바꿔 살 길을 넓히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 누구도 실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때,가장의 실직이 곧 '가정의 죽음' 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가족간의 배려는 더욱 절실하다.

신예리 〈경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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