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인준 누가 못받았나…이윤영·신성모·백낙준 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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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국회는 정부의 초대 총리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킨 기록을 갖고 있다.

48년 7월 제헌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李承晩) 박사는 첫 총리로 이북 출신의 이윤영 (李允榮) 의원에 대한 총리임명을 의회에 요청했지만 한민당이 중심이 돼 이를 거부했다.

1백32대 59표라는 압도적인 차이였다.

특이한 것은 총리인준 거부가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제 추진세력간의 갈등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제헌의회에서 이승만의장은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게 확실한 상황에서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했으며, 한민당은 의원내각제를 요구했다.

우여곡절끝에 대통령중심제로 낙착되자 한민당은 김성수 (金性洙) 씨를 총리로 지명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李대통령이 金씨에게 재무장관을 제의하고 李씨를 총리로 지명하자 한민당은 세를 몰아 부결시켰다.

2백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제헌의회는 무소속이 85명으로 주류를 이뤘고, 한민당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석)에 이은 29명으로 제2당에 불과했다.

결국 초대총리 자리는 민족청년단 (族靑) 을 이끌었던 이범석 (李範奭) 씨에게 돌아갔다.

민주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꾼 한민당은 50년 李대통령이 이윤영씨를 또 총리로 임명하자 다시 부결시켰다.

대신 신성모 (申性模) 국방장관이 총리에 지명됐으나 6.25가 터져 의회의 동의를 받지 못했고 그해 11월 총리서리로 물러났다.

李대통령은 백낙준 (白樂濬) 씨를 후임으로 임명했지만 의회는 또 동의안을 부결시켰다.

이윤영씨는 52년 세번째로 총리임명동의안이 거부된 진기록을 남겼고 동시에 11일의 최단임기 총리서리라는 기록도 보유했다.

51년 11월 李대통령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의회에서 부결된 뒤 민주국민당이 52년 4월 내각제개헌안을 제출하는 와중에서 생긴 일이었다.

내각제 시기였던 60년 8월 김도연 (金度演) 씨의 총리인준이 거부된 일도 있다.

유신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총리임명동의안 문제는 야당의 반발에 부닥쳐 몇차례 곡절을 겪었다.

10.26 직후인 79년 12월 취임한 최규하 (崔圭夏) 대통령은 신현확 (申鉉碻) 부총리를 총리서리로 지명했다.

지명 즉시 공화당을 탈당한 申총리서리에게 야당이던 신민당은 본회의 불참으로 맞섰으나 원내 다수였던 공화당.유정회의 도움으로 총리가 됐다.

여소야대 국회인 13대때도 파란이 있었다.

88년 노태우 (盧泰愚) 대통령이 지명한 강영훈 (姜英勳) 총리서리는 김종필 신민주공화당총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서리' 를 뗄 수 있었다.

당시 김영삼 (金泳三) 총재의 민주당과 김대중총재의 평민당은 姜씨가 70년 운영한 한국문제연구소가 중앙정보부의 자금지원을 받았다는 미 하원의 보고서를 들어 적극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의 집요한 설득에 당초 반대입장을 밝혔던 김종필총재가 암묵적 찬성으로 기울어 임명동의안이 통과됐다.

당시 민주당과 평민당은 이탈표를 막기 위해 백지투표라는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의원들이 기표소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가결정족수를 불과 13표 넘겼다.

91년 5월 정원식 (鄭元植) 총리 임명때도 야당의 반발로 청와대가 애를 먹었다.

94년 김영삼대통령때는 야당이 이회창 (李會昌) 총리 후임 이영덕 (李榮德) 총리서리에 대한 인준을 1주일이나 미루는 바람에 각료임명이 늦어지는 사태가 있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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