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되살아난 광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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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중등학교 중퇴 후 화가가 되기 위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미술학교에 지원했으나 두 차례나 낙방했다.

그후 몇년 동안 빈의 독신자 합숙소를 전전하면서 엽서.광고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당시 오스트리아 - 헝가리제국은 여러 민족들로 구성돼 있어 심각한 민족갈등을 겪고 있었다.

지배민족인 독일인에 마자르인.체코슬로바키아인.폴란드인.남슬라브인 등 다른 민족들이 반발했다.

이 와중에서 실패한 예술가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반 (反) 유대주의.반슬라브주의자로 탈바꿈했다.

반유대주의는 독일인의 민족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독일인 중소상공인과 자영농민의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불만이 표출한 것이다.

히틀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불우한 경험에서 비롯된 기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적개심, 비 (非) 독일인에 대한 맹목적 증오감, 그리고 가난에서 오는 심한 열등감을 곁들였다.

히틀러의 신념은 그후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즘으로 체계화했다.

나치즘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좌절에 빠져 있던 독일인들, 특히 중하류층으로부터 환영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심리적 보상을 위해 유대인들을 공격대상으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는 비단 중하류층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엘리트층에도 어필했다.

반유대주의는 독일의 국가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으며, 세계를 상대로 반유대주의를 조직적으로 선전했다.

1941년 나치독일은 유대인 말살정책을 공식화했으며, 집단수용소에서 6백만명 이상을 학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에서 반유대주의는 일단 사라졌다.

그러나 독일통일 후 다시 살아났다.

비단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외국인에 대한 배척으로 확대되고 있다.

공산치하에 있던 동독에서 특히 심하다.

통일 후 서독과 비교해 경제력에서 현저한 격차, 높은 실업률 등 사회적 불만이 외국인에 대한 무조건 배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독일경찰 통계에 따르면 현재 활동중인 네오 나치 숫자는 4만7천명, 지난해 이들이 저지른 테러행위가 5천2백건이나 된다.

특히 과거 동독은 외국인들의 기피대상 지역이 됐다.

독일에서 빈발하는 외국인 테러를 보노라면 히틀러의 광기가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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