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고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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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노스캐롤라이나 유세 길의 오바마.

뉴스위크 유럽 순방 때의 일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런던에서 보기 힘든 쾌청한 날이었다. 따뜻한 기온에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런데도 오후 내내 오바마는 윈필드 하우스의 갑갑한 연회실에서 외국 지도자들을 만나느라 바람을 쐴 기회가 없었다.

미국 정치 버락 오바마는 늘 보통 사람들처럼 자유로운 삶 바라지만 대통령 경호팀은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미국 대사관저인 윈필드 하우스는 런던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개인 정원을 갖춘 거대한 저택이다. 푸르고 무성한 잔디는 미식축구장 두어 개를 펼쳐놓은 듯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가장자리엔 막 꽃봉오리를 터뜨린 목련이 늘어섰다. 경호팀이 보안을 이유로 잔디밭 쪽의 관저 창문에 덮개를 씌워 잔디밭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뒤쪽 출입문이 잠깐씩 열릴 때마다 바깥 풍경이 오바마의 눈에 언뜻언뜻 들어왔다. 오바마는 마지막으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뒷문 쪽으로 걸어가 살짝 밖을 내다봤다. “이보게들!” 오바마가 데이비드 액설로드 수석보좌관과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에게 말했다.

“산책이나 좀 하세.” 그러자 경호원들이 “기겁을 했다”고 한 보좌관이 전했다. 경호원들이 황급히 달려 나가 사방으로 흩어져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경호원들은 이런 즉흥적인 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오바마를 짜증나게 만든다. 대통령과 참모들이 잔디밭을 몇 번이고 천천히 도는 동안 관저 지붕 위엔 저격수들이 거총 자세로 주변을 경계했다.

“ 약 45분 동안 산책했다”고 기브스가 돌이켰다. 그들은 걸으면서 업무에 관해 잠시 얘기했다. G20 정상회의를 무산시킬 뻔한 중국과 프랑스 사이의 극적인 상황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오바마는 대부분 묵묵히 경치를 즐기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그런 순간은 보통 사람의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대통령에겐 아주 드문 좋은 기회였다.

그 이틀 뒤 오바마는 프랑스의 한 마을회관 모임 자리에서 대통령으로서 개인적으로 힘든 점에 관해 이야기했다.

“너무 갑갑하죠. 예전엔 유럽에 오면 이곳 저곳을 돌아보다가 한 카페에 들러 느긋하게 앉아 와인을 마시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어요. 구멍가게에도 들어가 보고 해가 저물 땐 낙조의 아름다움도 마음껏 즐겼죠. 하지만 지금은 온 종일 호텔방에 갇혀 지내고 늘 경호원들이 주변에 맴돌거든요. 느긋하게 산책을 즐길 만한 자유가 없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실제로 백악관 ‘유리 거울’ 속의 삶에 불평을 터뜨린 대통령이 오바마만은 아니었다. 우드로 윌슨(28대 대통령)은 “그처럼 외롭고 황량한 삶이 가능하다고는 꿈도 못 꿨다”고 적었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27대 대통령)는 백악관을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곳”이라고 표현했다.

해리 트루먼(33대 대통령)은 “백악관으로 알려진 거대한 하얀 감옥”으로 묘사했다. 그와 비슷하게 빌 클린턴(42대 대통령)은 백악관을 “연방 교도소의 백미”라고 불렀다. 하지만 유독 오바마는 클린턴이나 심지어 조지 W 부시보다도 백악관 생활에 적응하기가 더 힘든 듯하다. 오바마가 보통 사람의 삶을 산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기 전 연방 상원에서 4년을 보냈을 뿐이다. 물론 공인으로서의 삶이 생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상원의원 시절엔 보통 사람의 삶을 누렸다. 의사당 주변을 산책하고 싶을 땐 얼마든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오바마를 백악관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게 만든 요인 중엔 그 자신의 성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오바마는 겉으론 외향적이지만 집안의 독자로서 혼자 지낸 시간이 많았다. 그런 기질은 쉬 바뀌지 않는다. “그는 고독을 즐긴다”고 한 절친한 친구가 말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며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껏 숨쉬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는 그럴 여유가 없다.”

오바마에게 하나의 피난처는 캠프 데이비드다. 처음엔 메릴랜드주 산악 지대의 외딴 곳에 있는 이 대통령 별장이 뭐가 그리 좋겠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취임 몇 주 뒤 처음 가자마자 그곳에 푹 빠져들었다. 기자단도, 지켜보는 국민도 없는 그곳에서 오바마 가족은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있는 그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고 한 보좌관이 전했다.

오바마 가족은 별장의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마음껏 누비고 다녔다. “그곳엔 마음을 가라앉히며 산책할 만한 장소가 널려 있다”고 백악관 고위 보좌관이며 오바마 가족의 오랜 친구인 밸러리 재럿이 말했다. 오바마를 ‘참 안 됐다’고 동정하기는 어렵다(그도 그런 동정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그 자신이 백악관에 갇히는 ‘특권’을 얻으려고 그토록 열심히 애쓰지 않았던가? 게다가 첫 임기가 끝나고 나면 그가 4년을 더 연장해 달라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는 참모들에게 대통령직에 따르는 화려함과 의전을 즐기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오바마는 처음으로 시카고의 인수위 사무실에 갔다.

그가 지나갈 때 참모들이 책상에서 일어서서 신임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했다. 사무실을 가로질러 가던 오바마가 갑자기 멈춰 섰다. “이거 정말 너무 하지 않아요?”라고 오바마가 말했다고 한 보좌관이 전했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백악관에 들어간 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오바마는 여전히 가는 곳마다,

연설을 마칠 때마다 울려 퍼지는 미국 국가를 듣는 데도 아직 익숙하지 않다. 사실 그는 그런 의전을 즐기지 않는다. 오바마는 자신이 이동할 때마다 사전 계획과 보안 문제로 쓸데없이 노력과 시간을 허비하는 상황을 너무도 싫어한다. 한 보좌관에 따르면 지난 3월 캘리포니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착륙 후 1차 목적지인 오렌지 카운티의 마을회관 모임까지 가는 데 30초 동안 차를 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걷고 싶다”고 오바마가 경호 책임자에게 말했다. “절대 안 됩니다, 각하”라며 그 요원은 거리가 약 700m나 된다고 설명했다. 오바마는 따져봤다. “그래 봤자 걸어서 5분 정도잖아.” 하지만 경호 책임자는 너무 위험하다며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오바마는 어쩔 수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 리무진에 올라탔다.

30초 뒤 단상에 오를 준비를 하며 오바마는 참모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이 행사를 끝내고 나갈 때는 걸어서 갈 거야!” 대통령 리무진이 곁에서 천천히 따라오는 가운데 오바마는 혼자서 전용기가 대기하는 곳까지 걸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말이 무색했다. 경호원, 참모, 구급의료 가방을 든 백악관 주치의 등 약 100명이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그런데도 오바마는 대통령 전용기의 좌석에 다시 앉자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었다. “정말 너무 좋았어”라고 그가 말했다. 백악관에 살며 일하는 데도 좋은 점은 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오바마와 그의 가족이 거의 매일 밤 한 지붕 아래 지내게 됐다. 2005년 상원의원 선서를 한 이래 거의 불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오바마는 평일이면 미셸, 그리고 두 딸 사샤와 말리아가 시카고에 있는 데도 워싱턴 DC에서 홀로 지냈다. 이제 그들은 거의 매일 저녁 식사를 함께한다. 지난주 오바마는 아이오와주를 잠시 방문한 뒤 전용 헬기를 타고 가다가 백악관에 이르자 바깥을 가리켰다. “저것 봐!”라고 오바마가 참모들에게 말했다.

미셸, 말리아, 그리고 얼마 전에 구입한 애견 보가 트루먼 발코니에서 헬기가 내려앉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그에겐 너무도 행복했다”고 재럿이 말했다. “가족과 함께 지낸다는 것 말이다. 그와 그의 가족에겐 무한한 즐거움이다.” 오바마가 백악관에 살면서 아쉬워하는 일들은 무척 사소한 축에 든다.

200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한 직후 오바마는 아내와 고위 참모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의 경호를 받기로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미셸과 데이트하는 시간 등을 갖는 등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로는 부부만의 데이트나 즉흥적인 외출을 하려 하면 경호실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오바마 부부의 모든 동선(動線)과 세부 행동 사항, 그리고 보안 계획이 사전에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는 즉흥적인 외출이 불가능하다”고 재럿이 말했다. 그러나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지난 1월 오바마 가족이 백악관에 들어간 직후 워싱턴에 첫 폭설이 내렸다. 적설량이 시카고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지만 미셸과 딸들은 눈 덮인 잔디에서 놀려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길에 그들은 대통령 집무실에 들렀다. 오바마가 참모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사샤와 말리아는 급조한 썰매를 오바마에게 보여줬다. 백악관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 하나가 쿠키를 굽는 알루미늄판으로 만들어준 썰매였다. 딸들은 집무실의 문을 닫고 나가면서 아빠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오바마가 “오늘 회의는 1분 후에 끝냅니다”라고 선언했다. 정확히 60초 뒤 오바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가족들과 눈밭에서 뛰어놀았다.

HOLLY BAILEY 기자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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