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SI 시나리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9면

 2009년 4월 8일. 멕시코 오악사카에서 39세 여성이 독감·설사 증세로 입원했다. 이 여성은 입원한 지 닷새 만인 13일 사망했다. 멕시코 정부는 특이한 사망을 보고받았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4월 22일. 40여 명이 비슷한 증세로 숨지자 멕시코 정부는 심각성을 깨닫고 방역에 나섰다. 돼지인플루엔자(SI)는 이렇게 시작됐다.

4월 30일. SI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돼지와 상관없이 사람끼리 병을 옮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에서도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염병 경보수준을 5단계로 높였다. 대유행(Pandemic)이 임박했다는 의미다.

5월 13일. 첫 사망자가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세계 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SI 환자는 5만 명을 넘어섰다. WHO는 저지선이 돌파당했고 대유행이 시작됐음을 인정했다. 백신 제조업체들은 계절적 인플루엔자 백신 생산라인을 SI 백신 생산라인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백신 공급에는 6개월이 걸린다.

7월 30일. 북반구는 기온이 올라가면서 전파 속도가 한풀 꺾였으나 겨울이 한창인 남반구는 환자가 계속 늘었다. 환자는 1000만 명에 도달했다. 사망자도 10만 명을 넘어섰다.

9월 25일. 백신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서두른 덕분에 예상보다 빨랐다. 하지만 면역이 생기려면 접종 후 다시 한두 달 기다려야 한다.

12월 15일. 백신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격리치료 환자 수도 줄기 시작했다.

2010년 3월. 유럽에서 변종 SI가 발생했다. 전염성이 높아 세계 곳곳으로 빠르게 퍼졌고 환자가 다시 1500만 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미 병을 앓았던 사람이나 백신 접종을 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면역을 갖고 있는 덕분에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

2011년 5월. WHO는 SI 대유행이 끝났음을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21세기 인류가 치러야 할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겨우 한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SI가 엄청난 희생자를 낸 1918년 인플루엔자처럼 대유행으로 번질 것인지는 발생 후 한 달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앞으로 1~2주 동안 철저히 막으면 이 같은 가상 시나리오는 현실화되지 않을 것이다. 대유행을 막기 위해 보건 당국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위생에 신경 쓰며 힘을 보태야 할 때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