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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1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새벽 3시였다.

한철규가 놀란 것은, 언제 그런 소동을 피웠느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잡아뗀 구레나룻의 멀쩡한 태도였다.

삭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그를 방으로 끌어다 눕혀준 이후 지금까지, 위협을 느낄만큼 요란하게 코를 골았던 사람의 얼굴이 어떠해야 한다는 현실적 표본은 없었지만, 그의 멀쩡한 얼굴을 보는 순간, 까닭 모를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으로도 구레나룻의 권유 따위는 매정하게 거절할 수 있는 핑계가 충분했다.

“난 이제부터 잠을 좀 자야겠는데요.” “창자가 뒤틀리고 니글거리지 않소? 당장 꼬인 창자부터 달래줘야 할 것 아닙니까. 잠이 모자라면, 낮에 벌충하기로 하고 싸게 나가십시다.”

부대끼는 꼴이 면박주어 쏘아붙인 해도 수월하게 단념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득바득 위인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도 거북한 일이었다.

입었던 옷 그대로 누워 있었으므로 옷매무새를 수습할 것도 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뒤따라 나서고 말았다.

선착장에는 벌써 어선들이 밝힌 집어등으로 대낮같이 밝았다.

화톳불을 피운 곳에는 장정들이 둘러서서 궁싯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포구를 마주보는 술국집으로 들어섰다.

구레나룻은 새벽부터 소주를 주문했다.

국사발에다 소주 한 병을 콸콸 쏟아부은 다음, 반 사발이나 쭉 들이켜고나서, 지난밤을 폭음으로 끝장낸 탐락 (耽樂) 의 진상을 불쑥 털어놓았다.

“영동식당 승희란 년 말입니다…. 내하고 딱 한번만 자자고 운을 떼놓고 군침만 삼킨지가 벌써 넉달이나 되었어요. 그런데 이 년이 날 뱃놈이라고 얕잡아 보는지,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요. 당초 운을 떼었을 때, 눈깔을 치뜨고 딱 잡아떼버렸다면 나도 진작 단념해버렸을 텐데, 이 미꾸라지 같은 년이 오늘 줄 듯 내일 줄 듯 애간장만 태우고 있으니 팔자에 없는 마른침만 삼키는 오줄없는 놈이 되고 말았소. 2년전 어판장에 와서 식당을 벌인 서울 여잔데, 기둥서방이 들락거리는 것도 눈치도 아니더라 이겁니다.

배꼽 한번 맞추자 하고, 그동안 갖다 준 술값만 해도 수월찮아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탐탁찮게 여기는 그에게 막무가내로 배를 타자고 선착장까지 유인한 구레나룻의 속셈도 짐작할만 하였다.

그녀 혼자 살고 있는 집에 한철규와 같은 사내가 남아 있으므로 벌어질지도 모르는 외입질을 예상한 것이었다.

한철규에겐 발상 자체가 유치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구레나룻에겐 절실했던 당면문제로 이해할 수 있었다.

“기둥서방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누구라고 이마에다 새기고 다니진 않을 텐데요.” “승희를 넘보면서 이틀이 멀다 하고 그 식당을 들락거리는 작자들이 한 둘이 아니란 건 진작부터 알고 있소. 내 말이라면, 딴죽을 걸어서 남의 쓸개를 뒤집어 놓는 어젯밤 그놈의 속셈도 알고 보면, 나하고 한통속이오. 한선생을 영동식당에 묵도록 주선한 박길동이란 놈도 나하고는 라이발이오.” “연세로 보면, 젊은 사람들과 겁없이 겨루기는 다소 부대낄 나이가 아닙니까?” 한철규의 비꼬는 말에 구레나룻은 당장 비위가 뒤틀린 것 같았다.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게트림한 뒤, 소주 사발을 깨끗이 비우고 보란 듯이 쏘아붙였다.

“여보시오 한선생. 나로 말하면, 이 어판장에서 내로라 하는 변강쇠요. 이 포구를 샅샅이 뒤진다 해도 내 자리를 넘볼 수 있는 놈 찾기는 어려울 거요. 내 나이가 시방 오십이지만, 내하고 같이 잔 계집치고 새벽에 코피 안 쏟은 여자는 철든 이후로는 한번도 못봤소. 시방 날 어떻게 보고 대중없는 소리로 까부실려는 거요.” “아니라면, 미안해요. 그렇다면, 영동식당도 형씨가 변강쇠란 소문 때문에 지레 겁먹은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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