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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후 10년] 中. '햇볕' 든 남북관계 화해 교류 봇물 터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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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5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건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일성 사망(1994년 7월 8일) 이후 10년간 남북관계는 6.15 남북공동선언이란 돌파구를 통해 극적 진전을 이뤘다. 그러나 초기엔 경색된 관계였다. '수령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졌던 북한은 남한 내 일각에서 제기된 조문 주장을 김영삼 정부가 일축한 것을 계기로 거리를 둔다. 북한 핵문제가 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를 통해 가닥을 잡았지만 관계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이 분위기는 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햇볕 정책'을 추진하면서 바뀐다. 그해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선 금강호가 첫 출항하면서 남북관계는 해빙 무드에 접어든다. 그러나 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 99년 6월 연평해전 같은 북한의 호전성을 보여주는 도발적 행동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6월 13일 평양에서 이뤄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은 남북한이 화해협력의 동반자로 공존할 수 있다는 기대를 남북 모두에 심어줬다. 또 이 일을 계기로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의 후계자라는 위상을 남측으로부터 공인받았다.

정상회담 뒤 남북 교류협력은 급물살을 탔다. 89~97년 2405명에 불과했던 남북 인적 교류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98년 3317명 수준이던 데서 지난해에는 1만5280명으로 급증했다. 남북 교역도 89~97년 평균 1억7200만달러였던 것이 지난해는 7억2400만달러로 늘었다. 70년대부터 김일성 사망 때까지 연평균 10여회에 불과하던 각종 남북회담은 봇물을 이뤄 6.15 공동선언 이후 4년간 110여차례의 크고 작은 회담이 열렸다.

남북관계 진전의 촉매 역할을 한 대북 지원은 정부와 민간 차원을 합해 98년 3185만달러(약 429억3000만원)이던 것이 지난해는 1억5763만달러가 됐다. 그러나 쌀과 비료를 북한에 지원하는 과정에서 국민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퍼주기 논란'이 일었다. 또 정상회담 과정에서 북한에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한 것이 드러나 특검을 통해 관련자들이 처벌되는 사태를 불렀다. 대북 정책의 불투명성에 대한 질타도 이어졌다.

북한은 6.15선언에 담긴 '우리 민족끼리'란 이념을 내세워 민족공조 논리로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특히 남한 내부의 반미 감정과 개혁 움직임의 틈을 파고 들었고, 남한 사회에서는 대북 문제를 두고 남남갈등이 고조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난 10년간 남북관계의 진전 과정에서 북한의 대남 의존도는 커졌고 이는 김정일 체제의 개혁.개방 바람과 맞물려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정부 당국은 예상하고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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