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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기업, 고금리 자금난으로 화의신청후 6∼8% 이자만 물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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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IMF의 파고 (波高) 를 부도로 넘는다. ”

여느 때 같으면 '황당한 소리' 로 핀잔들을 이런 말이 IMF 관리하의 고금리시대를 맞아 업계에서 설득력있게 퍼지고 있다.

부도내더라도 법정관리나 화의 (和議) 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이자비용이 엄청나게 싸지는 혜택을 톡톡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일단 망하더라도 살인적 고금리를 피하고 재기의 말미를 벌 수 있다는 계산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말 동종 업계에서 재무구조가 나은 편이라는 평가 속에서도 결국 부도를 내고만 한 상장건설업체는 주거래은행의 협조융자 제의를 굳이 마다하고 '자폭' 의 길을 택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말 주거래은행의 긴급자금 지원으로 부도위기를 간신히 넘겼던 한 상장 조명업체도 해를 넘기자마자 금세 백기를 들고 말았다.

증권업계에서는 연말연시에 부도낸 몇몇 기업에 대해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라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위기다.

회사채 금리가 연 30%에 가깝고 은행 대출금리도 연 20%를 코앞에 두고 있는 마당에 통상 연 6~8%에 불과한 법정관리.화의기업들의 이자부담은 거저나 다름없다는 게 자금난에 봉착한 기업들의 착상이다.

게다가 몇달간의 재산보전처분 기간동안 일체의 채무가 동결된다.

부도가 해당 기업에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 만무하다.

오너는 '부도기업주' 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기업 이미지에도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남는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부담에 애간장태우느니 체면이고 뭐고 돌볼 겨를이 없다는 게 최근 기업주들간에 급속히 번지고 있는 솔직한 심정이다.

회계법인이나 법률사무소 등의 기업재무 컨설팅 전문가들까지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버티지 말고 화의를 한시바삐 신청하라” 는 조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해말부터 중견기업의 흑자부도가 줄을 이은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와 관련, 증시에서도 부도낸 상장사들의 주가가 상한가 행진을 펼치는 경우가 많아 눈길을 끌고 있다.

향영21세기리스크컨설팅 이정조 사장은 “관리종목에 편입되면 주가가 폭락세로 돌아서는 게 보통이지만 근래 부도낸 기업들은 단기자금 경색으로 흑자도산한 경우가 많고 금융비용 절감 혜택으로 경영실적 호전이 예상돼 외국 '기업사냥꾼' 의 표적이 되기까지 한다” 고 전했다.

하지만 중견기업들이 법정관리나 화의 제도를 믿고 생존전략 차원에서 도산의 길을 너무 쉽게 택하는 기현상은 정상적 산업구조조정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사법부가 파산유예제도를 보다 엄격히 운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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