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소로스가 어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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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말레이시아 총리는 월스트리트의 큰손 조지 소로스를 얼간이.범죄자라고 불렀고 태국 부총리는 소로스가 태국에 나타나면 마피아를 시켜 혼뜨검을 내겠다고 벼른다.

한국의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은 대통령당선자가 국제 투기꾼에게 칙사대접을 했다고 비난했다.

소로스는 얼간이에, 범죄자에, 투기꾼일 뿐인가.

그는 칼국수나 먹고 갔어야 할 인물인가.

대통령당선자가 오찬을 같이한 것은 과공 (過恭) 인가.

소로스는 어림잡아 세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투기꾼이고, 국제금융의 사부 (師父) 고, 행동하는 철학자다.

투기꾼 소로스는 1992년 9월 유럽의 환율조정장치 (ERM)가 무너질 것을 예견하고 영국의 파운드화를 공략해 한목에 10억달러를 벌고 85년엔 2년 뒤 닥칠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폭락사태를 예견했다.

그의 퀀텀 펀드는 지난 27년 동안 연평균 35%의 수익률을 올렸다.

69년 퀀텀 펀드에 1천달러를 맡긴 사람이 배당금까지 재투자했다면 지금 그 1천달러는 2백만달러 이상으로 불어났다.

퀀텀 그룹 7개 펀드의 재산은 1백억달러다.

금융전문가 소로스는 세계경제.국제금융, 그리고 개별국가의 경제를 거시적으로 보는 탁월한 안목을 갖고 이 방면의 권위있는 책을 세 권, 국제정치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썼다.

그는 철학에서 인식론을 빌려와 투자자와 시장이 쌍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 역동적 시장 변동에 관한 독자적인 이론을 개발했다.

행동하는 철학자 소로스는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졸업후 철학에 심취해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의 철학자 칼 포퍼의 논문지도를 받고 헤겔과 데카르트에 관해 비판적인 논문을 쓸 정도의 철학적인 소양을 갖췄다.

헝가리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소로스는 아버지의 기지로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 학살에서 구사일생을 얻었고 45년 소련군이 진주할 때 영국으로 건너갔다.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체험한 그는 80년대초부터 소련.동구권의 반체제운동을 지원하고 31개국에 '열린 사회재단' 을 세워 13억달러의 기금을 냈다.

소로스는 고삐 풀린 시장 (市場) 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못지 않게 열린 사회를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장이 자유경쟁을 통해 스스로 균형을 잡는다는 자유방임주의에 반대한다.

돈으로 세상을 얻은 그가 돈이 모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세태를 개탄하는 것은 아이러니로 들리지만 그것이 철학자 소로스의 면모다.

소로스는 세 개의 얼굴을 갖고 서울에 왔다.

정치와 경제를 한 두름에 꿰어 거시적으로 보는 금융전문가 소로스는 김대중 (金大中) 당선자의 자문에 응했다.

투기꾼 소로스는 한국경제의 회생 가능성과 방법과 투자대상으로서의 한국을 진단하고, 돈만 가지고는 성이 안차는 지적 (知的) 인 허영심을 가진 철학자 소로스는 역시 지적 호기심과 지적 허영심이 강한 김대중 당선자와 교유 (交遊) 했다.

소로스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는 92년 이전엔 당시 미국.소련.영국의 지도자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고 뉴욕 타임스나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 한번 하기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고 자랑한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세일스맨이 되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 대통령당선자가 월스트리트의 큰손을 직접 만났다고 뒷 공론이 무성하다.

무책임하고 한가한 발상이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선진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의 지원은 필요하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투자가들이 돌아와야 한다.

소로스가 오면 투자가와 투기꾼들도 움직인다.

대통령당선자는 더 많은 소로스들과, 심지어 그만 못한 사람들도 더 많이 만나야 한다.

금융.외환에 관해 대통령이 한밤중에라도 국제전화로 의견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자산이 어디 있겠는가.

다양한 취향을 갖고, 이젠 돈보다 인간의 조건에 더 관심이 있다고 자부하는 소로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김영희<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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