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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스트+ 과학자’ 고봉인씨가 성공한 까닭

중앙일보

입력


‘첼리스트+ 과학자’ 고봉인씨가 성공한 까닭
스스로 깨달을때
재능이 빛을 발해
부모는 기다려줘야

다재다능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욕심은 부모라면 누구나 인지상정이다. 요즘 특목고들도 세계 인재를 기르는 방법의 하나로 예체능과 지식의 겸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잘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런데 고봉인(24)씨는 음악가와 과학도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국내에서는 첼리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무대와 실험실을 오가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고씨의 어머니 백승희(50)씨는 자녀 교육법을 묻는 질문에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이가 배운것을 스스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기다리고 응원해 준 것이 힘이 됐다”고 운을 뗐다.

실험하고 피아노 치는 부모 영향 받아
고씨는 12살 때 제3회 차이코프스키 영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이어 2년뒤 독일 크론베르그 ‘란드그라프 폰 헷센’ 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지난해 10월에는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제27차 윤이상 연주회에 초청됐다.한국 출신 첫 연주자로 북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남·북한 음악사에 기록을 남겼다. 학업 성취력도 이에 못지않다. 하버드대 세포생물학 전공과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 석사 과정을 병행했다. 지금은 하버드 줄기세포 연구센터에서 조혈모 줄기세포를 연구 중이다.예부터 ‘자녀교육은 부모’라 했다. 고씨에겐 부모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투영돼있다. 아버지 고규영(52·KAIST 생명과학과 교수)씨는 혈관질환 치료 단백질을 개발해 2년 전 분쉬의학상을 수상한 의과학자다.의대를 수석 졸업했지만 의사직을 버리고 불치병 치료를 위한 신약 개발 연구자의 길을묵묵히 걸어왔다. 세인들이 돈벌이도 안 되고 고생만 한다며 만류한 길이었다. 고씨는 어릴때부터 그런 아버지의 실험실을 놀이터 삼아자랐다. 아버지가 저녁 식탁에서 그날 실험에 대해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도 고씨가 듣고 자란 세상 이야기였다.백씨는 “봉인이가 어릴 때 실험실의 유전자모형, 고장난 현미경 등을 갖고 놀다보니 신체장기 등을 그리는데 더 흥미를 보였다”고 말했다. 고씨가 그런 아버지를 따라 험난한 연구자 길을 고집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한 때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어머니의 모습도 고씨에겐 일상의 한 풍경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음악을 듣고 춤추거나, 어머니를 따라 무료 음악회를 찾아다니던 일상을 추억으로 갖고 있다. 고씨는 매일 밤 클래식을 자장가로 들으며 잠들었다. 특히 베토벤 소나타가 첼로 활을 잡게 만들었다.
 
본인의 끈기와 노력이 가장 중요
그러나 환경이 고씨를 만들었다는 말에 백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본인의 끈기, 더하기 부모의 기다림”이라고 강조했다. 환경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것이다. 백씨는 그 예로 봉인씨와 누나 명원씨 남매의 성장과정을 비교했다.백씨가 신이 내린 재능이라 믿으며 투자를아끼지 않았던 명원씨는 음악을 접었다. 반면 음악의 배움을 막았던 봉인씨는 첼리스트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백씨는 부모가단기간 조기교육이 아닌 “지속가능한 교육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설명했다.두 사람의 학습 성향을 보면 누나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식이었다. 새 악보를 보는 즉시 바이올린을 연주할 정도로 인지력과 학습속도가 빨랐다. 반면 동생 봉인씨는이해력이 더뎠다. 백씨가 평범하게 공부를시킬 생각으로 음악도 가르치지 않았다.
 
백씨는 “명원이는 요구 수준에 오르면 더이상 반복하기를 싫어했다. 이 때문에 많이 다퉜다. 부모 욕심으로 강요한 것이 마음의 압박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백씨는 이를 교훈삼아 고씨가 음악적 흥미를 지속하는데 집중했다. 완벽하게 익히지 않아도 새 곡으로 진도를나갔다. 한 곡을 배우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도기다렸다. 가급적 배운 곡을 혼자서 연습하는시간을 많이 갖도록 했다. 곡을 이해하고 자신의 곡으로 소화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백씨는 한국의 음악교육을 외국과 비교하며 “레슨에만 집중하는 교육에서 벗어나야한다. 따라하기에 치중하면 연주기술 습득에만 급급해 부모도 재촉하게 된다. 나도 뒤늦게 이를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스스로 곡을 깨달을 때 재능이 수직 상승한다. 부모가 그 때까지 기다리고 배려해야 한다.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조언했다.
 
공부와 음악시간은 철저히 분리
‘공부는 학교에서 음악은 집에서’. 백씨가 지켜온 자녀 교육의 원칙이다. 음악과 학업을 병행하므로 서로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고씨도 방과 후 연주 연습에 몰두하려고 학교 수업에 집중하는 열의를 보였다. 백씨는 “초등학교 때 담임교사 말이 수업시간 내내 교사와 눈을 맞추는 아이는 2~3명뿐인데 봉인이가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부모는 다만 학업기초를 튼튼히 쌓는데 관심을 두고 응원했다. 백씨는 고씨가 초등 5학년이 되던 때부터 10여년 동안함께 계획표를 짰다. 예를 들면 첼로 연습시간을 기술훈련 O분, A곡 연습 O분, 연주 복습 O분식으로 내용별로 세밀하게 나눴다. 시간개념과 행동방침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백씨는 “봉인이가 이달 초 전주·대전·서울로 연이은 3개 무대의 협연을 실수 없이 준비·소화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훈련이 몸에 뱄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머지는 자유시간이다. 인터넷 기사를 보고, 농구도 하고, 소설책도 읽었다. 그 중 백씨는 만화영화를 꼭 보여줬다. “만화의 재치 넘치는 내용과 멋진 배경음악은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하는 훌륭한 교재”라고 추천했다. 이때문에 고씨는 어릴 적 아버지의 실험을 소재로 공상과학 소설을 자작하기도 했다. 백씨는“연주회 일정에 쫓겨도 수업을 빠진 적이 없다. 이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 자체가 스스로 의지를 다지는 힘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미엄 박정식 기자 tango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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