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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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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호 11면

“왱왱” 날아다니는 날파리 하나, 어딜 봐도 영 변변찮다. 그러나 어쩌다 앉은 곳이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의 꼬리였다. 잠시 뒤 “히히힝” 하면서 기운차게 땅을 박차고 달려가는 천리마! 덕분에 파리도 말꼬리에 붙어 함께 천리를 갔다···.
자기 스스로는 대단치 않지만 어쩌다 대단한 인물과 인연을 맺어 덩달아 출세한 사람을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라고 한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이 한나라 고조 유방을 따랐던 공신들을 두고 이 말을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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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스스로도 젊은 시절에는 매일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건달이었지만, 그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를 세운 공신들도 출신이 영 시원찮았다. 시골의 말단 관리(소하), 마부(하후영), 비단장수(관영), 개백정(번쾌), 날라리 백수(한신)···. 이들이 우연히 유방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언감생심 한 나라의 승상이나 장군이 되고 역사책에까지 이름을 남길 깜냥이었겠는가. 아니, 당시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의 난세만 아니었어도 아마 유방 본인조차 그냥저냥 하류 인생을 살다 마쳤으리라.

한국사에서도 세상이 어지러울 때 ‘천리마 꼬리의 파리’처럼 졸지에 이름을 날리고 고관대작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가령 수양대군, 즉 세조를 도왔던 한명회·홍윤성·양정 등이다. 한명회의 경우 사극에서는 제갈공명처럼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그려진다. 한명회가 짜낸 꾀로 세조가 김종서도 없애고, 안평대군도 물리치고 마침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한명회는 제법 괜찮은 집안 출신이지만, 글공부 재주는 없어 과거만 보면 번번이 낙방했다. 그래서 연줄로 얻은 궁궐지기라는 따분한 직책은 이름만 걸어 두고, 허구한 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쌈박질이나 즐기곤 했다. 그래도 리더십과 용기는 남달랐던지 왈짜패의 ‘큰형님’ 노릇을 톡톡히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한명회를 소개받았을 때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기개가 뛰어난 사람”이라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수양대군은 그렇게 기개가 뛰어난 골목대장이 아쉬웠다.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려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무력이 꼭 필요한데, 그에게 공식 병권은 없고 사병(私兵)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 곤란했다. 그래서 한명회가 한양 바닥에서 힘깨나 쓴다는 어깨들을 모아다 주니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수양대군은 마침내 이들을 이끌고 김종서·황보인 등을 때려죽이고는 실권을 잡으니, ‘계유정난’(1453)이다. ‘하늘 천 따 지’도 모르던 사람들, 어제까지 시장통에서 주먹질이나 일삼던 사람들이 우르르 ‘정난공신’의 이름을 얻고 벼슬 자리를 받았다.

이보다는 출신이 나은 편이지만, 역시 평소라면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했을 2류·3류 인사들이 하루아침에 정승·판서를 꿰차고 앉은 예도 있었다. 인조반정(1623)이다. 여기 참여한 반정공신 중에서 김류·이귀·최명길은 그럭저럭 얼굴이 섰지만, 김자점·심기원 등은 가문으로나 재능으로나 요즘 말로 ‘듣보잡’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 수 있었던 까닭은 거물부터 차례차례 찍어내 버리는 당쟁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직전부터 불이 제대로 붙은 당쟁은 전쟁보다 훨씬 길게 끌었다. 마침내 정인홍·유희분 등의 북인이 승리하여 ‘북인 독재정권’을 꾸미니 이원익·이덕형·이항복 등 서인과 남인의 인물들은 그 통에 죽거나 귀양 가 버리고 일을 꾸밀 사람은 2류 아니면 3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북인의 후원자였던 광해군조차 “노성(老成)한 신하들은 모조리 조정에서 내쫓고, 뭣도 모르면서 목소리만 큰 사람들만 남겼으니 나랏일을 의논하려 해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을까. 결국 북인조차 인조반정으로 내몰리고 나니 가뜩이나 부실한 정부의 업무 능력은 더욱 한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그토록 어이없이 쓰러진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세에 영웅이 난다던가? 또 고인 물은 썩는다던가? 과거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태평천하가 계속되다 보면 부와 권력이 소수 문벌에 집중된다. 재능 있는 사람도 집안이 딸리면 기를 못 펴게 된다. 또한 자유로운 발상, ‘창조적 파괴’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화되고 만다. 그래서 이따금 난세를 틈타 천리마가 기운차게 달려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꼬리에 ‘듣보잡’ 파리가 몇 마리 붙어 갈지라도.

그런데 한왕조의 통일은 중국의 부흥을 가져온 성공적 프로젝트였다고 하는 반면, 계유정난이나 인조반정은 별로 좋은 말을 못 듣는다. 그 주역들도 평가가 엇갈린다. 왜 그럴까? 우선 한고조 유방은 천하통일 후 대부분의 공신을 숙청해 자신이 죽은 뒤 그들이 날뛸 근거를 없앴다.

반면 세조는 사육신 사건 이후 한명회 등 정난공신에게 더욱 의지했으며, 엉겁결에 왕이 된 인조 역시 끝까지 공신들을 두둔했다. 공신들 스스로도, 이를테면 한명회나 김자점 등은 용케 얻은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꿔 보자,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자는 등의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더 튼튼히 하려고 암투를 벌였으며, 권력의 맛에 취해 사치와 방탕에 빠졌을 뿐.

그래서 역사는 그들을 혁명가라 부르지 않고, 간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물갈이는 필요하다. 그러나 바뀐 물이 단지 개인의 욕망에만 급급하다면 기대는 환멸로 바뀐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밀려나고야 만다. 간신은 ‘정규 코스’와 달리 출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권력을 어떻게 잡았느냐가 아니라 권력을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 간신 여부가 결정된다.

요즘 신문 보기가 편하지 않다. “설마 했는데” “이럴 줄이야” 소리가 나오는 기사가 매번 실려 있기 때문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지만 털어 보니 재채기가 날 정도로 먼지가 휘날리는 옛 권력자의 측근들. 그들도 천리마 꼬리에 붙어 파란 지붕 집까지 뛰어들었던 파리였을까. 간신을 경계하면서도 어느 틈에 간신을 양산했던 조선 사람들. 기성 정치인에 실망해 부패 척결을 부르짖는 참신한 인물을 뽑아 주고, 또 실망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러는 우리를 보면 그들은 뭐라 할까.


함규진은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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