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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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1장 슬픈 아침 ⑤

자동차를 그토록 불안한 속도로 거칠게 몰아가고 있었으나, 긴장된 가운데서도 이상하게 졸음이 덮쳐왔다.

한 순간 깜빡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소스라쳐 눈을 떴을 때, 자동차는 벌써 소양댐 상류 쪽을 왼편으로 끼면서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 홍천을 지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속도는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안개 때문이었다.

자동차가 굽은 산자락길을 돌아갈 적마다, 불빛으로 안개 자락을 헤집느라 주춤거려야 했다.

그러나 그곳까지 도착할 동안 강제 하차를 당했다거나, 차가 강변 아래로 곤두박히는 불상사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안개로 말미암아 어둠이 주는 추상적인 두려움이 삭제된 대신, 안개가 누리는 환상적인 무늬들은 시각을 마비시키면서 현실적인 거리감을 묻어버리고 있었다.

사내는 때때로 와이퍼를 움직여 앞 차창 위로 켜켜이 묻어나는 안개를 걷어내곤 하였다.

그는 저절로 터져나오는 하품을 손바닥으로 가로 막았다.

"이십분만 더 가면 휴게소라는 기 나타날 낍니더. 거기서 해결할꺼 해결하고 떠나지요. 형씨도 괜찮겠습니껴?" 사내는 가무잡잡한 얼굴을 들어 그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순간 그런 태도가 고마웠다.

자신의 처지가 어떠했던 수면 속으로 잠식되어 있었던 시간이 쑥스러웠다.

"미안합니다.

깜빡 졸았어요. " "갑빡 졸았다꼬요? 두 시간 가까이 코를 박고 푹 잤다는 생각이 안듭니껴?" "내가 그랬어요?" "그랬다마다요. 형님뻘이 아니랬으면, 콱 쥐어박았을지도 몰라요. 야간 운행에는 옆에 말동무 할 사람이 있어야 졸음이 안오는데, 코까지 곯고 자니까 신경질 많이 나데요. " "미안해요. 마음과 몸이 너무 피곤했어요. " "알고 있습니더. 심신이 피곤한 사람이 아니라면, 밤중에 속초에 있는 시인을 찾아 나섰겠습니껴. " 안개 속으로 휴게소의 입간판이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새벽 1시였다.

휴게소 안 쪽은 인적이 없었고, 건물 현관에 걸린 외등만 뿌옇게 켜져 있었다.

차를 세우면서 사내는 마당가에 설치된 자판기를 가리켰다.

사내는 바지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찾아내더니 자판기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연달아 두 잔의 커피를 꺼냈다.

톡 쏘는 듯한 새벽의 진한 커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명료하게 느껴졌다.

입으로 훅 불면, 연기처럼 흩어질 정도로 짙은 안개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빈 컵을 쓰레기통으로 던지며 사내가 말했다.

"자동차로 가서 한 이십분만 기다려 줄랍니껴?

볼일 잠깐 보고 올낍니더. " 그의 답을 듣기도 전에 사내는 재빨리 휴게소 건물 뒤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눈치는 아니었다.

화장실을 지나쳐 왼쪽에 있는 건물 뒤 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기다려 달라는 동의를 구했으면서도 반응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느닷없이 서두는 사내의 거동에서 어딘가 개운찮은 낌새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자판기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안개 속으로부터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중 안으로 되돌아 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었다.

지금 자신이 만들고 있는 이런 물리적 행동들은 세상에 대한, 아니면 아내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려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가슴 속으로 안개처럼 낮게 깔리는 슬픔의 무게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마냥 아래로 침하 (沈下) 하는 심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애써 그런 침울을 기억하지 않으려는데도 이런 떨림은 분명 짙은 안개 때문일까. 그는 천천히 자동차로 걸어갔다.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강물 소리가 끊어진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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