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미국 여기자 2명 재판 회부” … 직접 대화 노린 인질 외교 본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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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24일 억류 중인 미국 ‘커런트TV’ 소속의 한국계 유나 리, 중국계 로라 링 등 여기자 2명을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공화국 해당 기관은 미국 기자들에 대한 조사를 결속(종결)했다”며 “해당기관은 미국 기자들의 확정된 범죄 자료들에 기초해 재판에 회부하기로 정식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그러나 구체적인 혐의는 공개하지 않았다.

북한의 ‘재판 회부’ 공언은 북·미 관계에서 여기자들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인질 외교’를 본격화한 것이다. ‘억류 장기화’로 유엔의 대북 제재를 주도하는 미국을 압박하고, 북·미 직접 대화로 판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게 다수 전문가의 지적이다. 22일(현지시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하원 청문회에서 “북한 정권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공언하자 다음 날 바로 ‘재판 회부’를 발표한 것도 이런 분석에 힘을 싣는다.

북한 전문 인터넷 매체인 데일리NK의 손광주 편집인은 “재판 회부 발표는 클린턴 장관의 발언에 대해 우리도 가만있지 않겠다는 맞대응성 협박”이라며 “유엔 제재의 날을 무디게 하면서 자신들이 요구하는 수준의 대화로 미국을 끌어내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북한이 재판 회부를 공언한 만큼 여기자들은 앞으로 기소돼 1심과 2심 재판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2심제다. 북한이 지난달 17일 밝힌 ‘적대행위’와 ‘불법입국’에 대해 각각 북한 형법의 ‘조선민족 적대죄’나 ‘비법국경출입죄’를 적용할 경우 최대 10년 이상의 노동교화형(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물밑에서 벌어지는 북·미 간 협상을 통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억류 장기화 여부는 인질 카드로 국면을 전환하려는 북한의 속내와 이를 읽고 있는 미국의 대응 사이 어디에서 타협점이 만들어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1996년 한국계 미국인인 에번 헌지커의 억류는 당시 빌 리처드슨 하원의원의 특사 방북으로 3개월 만에 해결됐지만 68년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 때는 11개월을 갔다.

우리 정부도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다. 북한이 억류 중인 개성공단의 남측 직원 유모씨에 동일한 수순을 밟으며 대남 압박 카드로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전면 참여하는 것을 견제하고, 자신들이 요구한 개성공단의 임금 인상과 임대료 조기 지급을 수용토록 하는 카드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개성공단 출입·체류 합의서’에 따르면 정부가 동의해 주지 않는 이상 유씨를 북한 국내법으로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은 그간 ‘남북간 정치·군사 합의 무효화’ 등 일방적으로 합의 파기를 주장해온 바 있어 정부로서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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