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청론]장수영 포항공대 총장…연구비 삭감은 안될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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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금 우리나라 기업들은 재벌그룹에서부터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유례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외화를 벌어들이는 방법은 수출인데 그나마 원자재 구입이 곤란해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고유한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 빚을 많이 지지 않은 기업들은 큰 어려움을 모른다.

고유한 기술은 하나도 없이 은행돈을 빌려다가 외형만 키워온 기업들이 특히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회사가 어렵다고 연구개발비부터 대폭 삭감하면 경제가 회복된 후에도 선두 주자가 되기는 어렵다.

미국에는 컴퓨터 통신망에 사용하는 라우터 (Router) , 스위치와 그에 관련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씨스코 (CISCO) 라는 회사가 있다.

지난 84년 스탠포드대학 전산소의 한 직원 부부가 자신들의 차고에 설립한 회사로 이들이 90년에 2억달러를 받고 매각한 회사가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커졌다.

현재 54개국에 1만1천명의 직원을 가진 거대 회사로 성장했으며 매출액은 94년 13억달러, 95년 22억달러, 96년 41억달러, 97년 64억달러를 올릴 정도로 급성장했다.

재산평가는 4백50억달러로 GM (제너럴모터스) 보다 많다.

전세계의 데이터통신 시장규모는 2백80억달러라고 하는데 씨스코의 점유율이 단연 선두다.

중국도 컴퓨터망 장비는 씨스코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87년 2백50만달러의 벤처 캐피털이 투자되었는데 10년 뒤인 지금 그 가치는 1백억달러로 4천배나 됐다.

이 회사가 고유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회사의 운영방법 또한 독특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회장이 반드시 사장 위에 있으나 이 회사는 47세의 사장이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최고경영자 (CEO) 다.

그는 보스톤의 왕 (WANG) 컴퓨터 부사장으로 일하다 의견 충돌로 사임하고 6년전 부사장으로 영입됐다.

씨스코는 또 사장이건, 회장이건 항공여행을 할 때 반드시 3등석을 타며 최고경영자의 사무실은 검소하기로 유명하다.

필자는 세계적인 회사인 IBM 본사 이사회가 열리는 회의장에 가 본 일이 있는데 우리나라 회사 회의실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검소했다.

정보통신 분야 선두 주자의 하나인 오러클 (Oracle) 의 회의실 천장에는 난방용 배관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씨스코에서는 회사운영의 목표가 고객 이익을 우선하고 그 다음에 직원의 이익, 협력회사와 주주의 이익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주에 대한 이익배당에 많은 신경을 쓰며 직원들에게도 주식배당을 많이 해준다.

따라서 직원들은 회사 경영상태가 좋으면 자신이 소유한 주식가도 올라가기 때문에 열성을 다해 일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업들은 안 써도 좋을 돈을 너무 많이 썼던 것 같다.

체육대회만 하면 나눠주는 기념품, 방문객들에 대한 답례품 같은 것도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

또 임원의 수가 일반적으로 너무 많다.

경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 기업들은 선진국의 모범적 기업경영을 배워야할 것이다.

장수영 <포항공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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