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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한국백경]1.산사의 선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98 사진영상의 해를 맞아 격변의 20세기말을 살아가는 한국과 한국인의 자화상을 사진으로 담는다.

국내 정상의 사진작가 주명덕.에드워드 김.강운구씨 3인이 번갈아 가며 글과 함께 연재할 현대한국과 한국인들의 모습은 아직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전통가치와 현대모럴의 공존, 오늘을 수놓는 다양한 삶, 그리고 이 모두를 감싸며 변화하는 한국의 자연환경을 테마로 했다.

고궁을 배경으로 곱게 치장한 한복차림의 여인사진이나 동해의 일출과 같은 판박이 사진에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는 20세기말의 가감없는 한국.한국인의 모습이 정상의 컬러 작품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이 작품들이 미래의 어느날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떠올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될 것을 기대한다.

첫회의 글은 특별히 소설가 최인호씨가 썼다.

구한말의 선승 경허 (鏡虛.1849~1912) 의 선화중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제자인 만공 (滿空.1871~1946) 과 둘이서 깊은 산중을 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바위 동굴속에 쉬면서 비를 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허가 바위굴의 천정을 올려다 보기를 거듭하였다.

이에 만공이 물었다.

"스님, 왜 그렇게 천정을 올려다 보십니까. " 그러자 경허는 대답하였다.

"이 바위가 갑자기 내려앉을까 염려가 되어서 그러네. " 어이가 없어진 만공이 다시 물었다.

"스님, 이렇게 큰 바위가 어떻게 무너져 내리겠습니까. " 이에 경허는 대답하였다.

"이 사람아,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네. " 경허의 이 말이야말로 진리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던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던 회사가 무너지고 은행이 쓰러지고 온 나라가 비틀거린다.

비명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내 이웃들이 목졸려 쓰러진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들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밀어닥친 천재지변인 것인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지는 조짐이 있었다.

서편 노을이 붉으면 내일 날이 맑고 달무리가 지면 내일 날이 궂은 것처럼 이 무너져가는 모든 비극적인 현상에도 몇번의 시대적 징조는 있었다.

하루아침에 성수교 다리가 무너지고 물질에 중독되어 조금이라도 낡은 것이라면 견디지 못하는 우리를 비웃듯 이미 삼풍백화점이 무너져내렸다.

그만큼의 징조가 있었는데도 우리는 신데렐라처럼 꿈에 젖어 있었다.

밤 열두시면 우리들의 황금마차는 호박이 되어버린다.

우리들의 화려한 야외복은 누더기가 되어버리고 황금마차를 모는 마부는 새앙쥐가 되어버린다.

그렇구나. 우리들의 황금은 황금이 아니라 호박이었고, 우리들의 찬란한 야외복은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로구나. 그러나 보라. 우리가 우리의 실체를 보았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가 미친 광기와 달콤한 환상에 젖어있던 한갖 가면놀이의 광대패임을 이렇게 뒤늦게마나 알게 되었으니 그리하여 알콜과 마약의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진면 (眞面) 을 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일찌기 한사람이 동산 (洞山.1890~1965)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엇다.

"춥고 더움이 찾아오면 어떻게 피합니까. " 동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춥고 더움 따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된다.

"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물었다.

"그렇담 어느 곳이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입니까. " 이에 동산은 대답하였다.

"추울 때는 자기를 철저히 차게하며 더울 때는 철저히 자기를 덥히는 곳이란다.

" 돌아가지. 우리 민족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그 심청이의 마음자리로 돌아가자. 애비를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고 기꺼이 임당수에 몸을 던져 죽어버리는 그 효녀 심청이의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자. 추울 때는 더운 곳으로 피하지 말고 오히려 더 자신을 차게하여 청빈과 정결, 겸손과 정직 속에서 신인간 (新人間) 으로 우리 모두 거듭 태어나자. IMF는 우리에게 찾아온 신데렐라의 꿈을 깨우는 열두시의 자명종 소리이며,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예수의 절규이며 무소유야말로 최고의 덕목임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고함소리가 아닐 것인가.

마음이 가난했던 심청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이제야말로 심봉사처럼 눈을 뜨고 상념에서 깨어나자. 그리고 깨어나 일어서자. 일어서서 다시 나아가자. 중국의 선승 조주 (趙洲)에게 한사람이 와서 물었다.

"난세 (亂世)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 이에 조주스님은 대답하였다.

"난세야말로 호시절 (好時節) 이 아니더냐. "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병든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민족성을 고치는 최고의 좋은 시절. 청빈과 정절의 선비정신으로 부활할 수 있는 호시절인 것이다.

이 절호의 기회마저 잃어버린다면 21세기를 맞는 우리 민족의 미래는 캄캄한 절벽일 것이다.

글=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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