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과자인가” 노인 “더 먹어야 효과” … ‘장롱 속 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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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월 초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주부 이모씨는 세 살짜리 딸을 데리고 강남성심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아이가 거실 테이블에 있던 타이레놀 시럽을 거의 다 마시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일단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아이가 들이켠 약은 어린이용 시럽이라 큰 탈은 나지 않았다. 의료진은 서너 시간 아이의 경과를 지켜본 뒤 귀가시켰다.

경기도 안양에 사는 김모(74)씨는 이달 초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불편해 예전에 먹다 남은 약을 먹었다. 5분 정도 지난 뒤 속이 메스껍고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김씨는 한림대 성심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의료진이 확인할 결과 김씨가 먹은 약은 항생제와 소염·진통제였다. 김씨는 캡슐에 들어 있어 소화제라고 생각하고 먹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성분의 약은 위장 장애가 있을 수 있고 둘을 같이 먹으면 위장 장애가 심해진다. 김씨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약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거나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약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노인이 약을 너무 많이 먹거나 잘못 먹어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가장 흔한 사고가 가정에서 어린이 손 닿는 곳에 약을 뒀다가 애들이 약을 먹는 경우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최경호 교수는 “아이가 빈혈약을 초콜릿으로 오인해 먹다가 위장 장애를 일으키거나 타이레놀 등 상비약을 먹고 간에 손상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소비자원은 어린이 약화 사고를 피하려면 “어린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약을 보관하고, 아이가 보는 데서 부모가 약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아이는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이다.

의사나 약사의 지시를 무시하다 화를 당하기도 한다. 11년째 고혈압을 앓고 있는 이모(43·서울 중구)씨는 약을 먹으면 금세 혈압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스트레스가 심할 때 약을 먹고 평소엔 먹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3일 새벽 고혈압 합병증으로 뇌졸중이 와 한양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수술을 받았다.

한양대병원 심장내과 이방헌 교수는 “고혈압 약 복용을 임의로 끊은 뒤 심장병·뇌졸중으로 숨지기도 한다”며 “고혈압 환자의 60%가량이 약을 제대로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인이 약을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사고의 원인이 된다.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가정의학과 윤종률 교수팀이 지난해 4∼8월 서울의 한 노인복지관 진료실을 찾은 노인 80명을 대상으로 과거 4주간 복용한 약에 대해 조사했다. 속쓰림·저혈당 등의 부작용을 경험한 노인 14명은 하루 평균 11.8개의 약을 먹고 있었다. 부작용 경험이 없는 노인은 6.3개였다. 조사 대상 노인 중 40명은 복용하고 있는 약품을 전혀 모르거나 거의 몰랐다.

대한약사회 박인춘 이사는 “노인들은 약에 대한 정보를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단골 약국을 정해 주기적으로 복약 지도를 받는 게 좋다”고 말했다.

박태균·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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