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연재 김주영 대하소설 '아라리 난장']작가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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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지금 우리는, 파산의 시대가 배설한 공룡화된 두려움과 허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위기의 벼랑은 언제 우리들로부터 물러날 수 있을는지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매우 암담한 지경에 놓여 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고, 박탈감에 시달림을 받고 있다.

나는 이런 위기의 시간에 벼랑 끝에 서 있는 40대 중반의 한 사내와 만났다.

그리고 그가 장차 전개할 파란만장의 인생역정을 밀도 있게 관찰하며 뒤따라가보려 한다.

나는 그에게 한 곳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는 유랑이라는 숙제를 주었다.

유랑이란 말의 배면에 깔린 대체적인 정서는 퇴폐적이다.

그리고 불투명한 전망과 야만성이 도사린 시간의 기다림이다.

그러나 그 말의 또 다른 측면에는 민중이 겪어온 전통적인 서정이 배어 있고, 몽환적인 목메임, 그리고 기다림과 떠나감의 애환이 피처럼 뚝뚝 묻어 흐르는 유장한 순환의 비명소리가 내재되어 있음도 발견한다.

나는 그를 위해서 부지중 우리들에게서 떠나가버린 것들과 겁없이 잊혀진 것들을 다시 꼼꼼하게 탐지해서 끌어 안으려 한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그리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을 모두 사랑하여 포옹하려 한다.

지난날 푸른 논두렁 뒤로 펼쳐진 수수밭 뒤로 사라지고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애정을 다시 일깨워 유랑의 역동적인 순환의 고리와 맞물리게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실의 시대를 구태여 증오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리고 실의에 빠진 한 남자가 지난 뿌옇게 흐려진 삶이 투명하게 비춰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같이 찾아보려 한다.

아무래도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란 물론 지고지순한 개념이며 순수하고 우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얼마든지 투박하고 저속한 이미지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이 사랑이 가진 폭과 넓이가 가이 없음을 증거한다.

그에게 사랑을 가지게 함으로써 또 한가지 고귀한 삶의 면류관을 획득한 인생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몫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숙제는 그와 그 주변 사람들의 삶을 천착한 다음 침착하게 계략을 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의 중량감을 야금야금 벗겨내어 그들에게 유쾌한 해방감을 안겨주는 일이다.

치명상을 입어 짓눌리고 왜곡된 그들 영혼의 숯에 기름을 부어 반딧불처럼 빛나게 하고 싶다.

그래서 그 삶의 무게중심이 아무리 호들갑스럽게 이동하여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장중하고 담대한 모습의 남자와 여자로 서있게 하고 싶다.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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