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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스터디 대표 손주은①] 교통사고로 딸 아들 잃고…자살충동까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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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은 ‘열정가’에다 놀랄 만큼 ‘꾸밈이 없는 사람’이었다. 인터뷰는 내내 파격이었다. 집무실의 ‘뽀샵’ 처리한 ‘손사탐’ 대형 브로마이드와, 인터뷰어 앞의 ‘손 대표’ 사이에는 엄청난 부조화가 있었다. 그가 과외강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색달랐다.



Q.학생 때 결혼하셨던데요.

사실은 과외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첫사랑 때문이었어요. 424일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만난 여자가 있었죠. 가난한 이대생이었는데 등록금을 대주려고 한 달에 여섯 명 그룹 과외지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대학 1학년 때인 81년에 헤어졌죠. 그 충격으로 헤매다 학사경고를 받았어요. 촉수가 날카로울 때였죠. 2학년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지만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어요. 3학년 때 또 학사경고를 받았죠. 절망의 나락으로 빠졌고 군으로 도망갔죠. 서울대 보낸 아들놈이 그리 되었으니 아버지는 충격으로 말씀도 하지 못하셨죠. 제대하고 복학하자 결혼을 시키더군요.

Q. ‘대책 없는 결혼’의 책임은 손 대표가 져야 했나 보군요?

그런 셈이죠. 결혼을 했기 때문에 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어요. 그때 어머니들과 죽이 맞았죠. 먹고살려니 일반 강사로는 안 되겠고 ‘객단가’를 높이려고 당시로서는 유례 없는 혼자서 전 과목을 가르치는 고3 입시지도를 시작했죠. 처음 가르쳤던 10명 중에 9명이 대학에 갔어요. 다음 해에는 4배의 수업료를 받았죠. 2년 동안 그때 돈으로 2억원 정도를 벌었어요. 그렇게 2년이 지난 뒤 유학을 고민해 보았는데 준비도 안 돼 있고 유학을 다녀와도 자리 잡을 자신이 없더군요. 다시 쉬운 선택을 했어요.

Q. 그냥 ‘과외를 천직으로 삼자’ 뭐 이런 거였나요?

사시를 보기로 했어요. 그해 3월 공부를 시작했는데 형법 책을 펼치니 머리가 아파요. 1주 만에 포기하고 신림동 당구장에 출근했죠. 와이프에게는 사시 준비를 한다고 했으니까요.

Q. 사시 준비라기보다는 도피였군요? 과외선생을 하기에는 그렇고, 다른 것은 자신이 없고, 뭔가는 하는 척해야 하고….

맞아요. 5월 8일 사시 1차 시험을 치르고 나니 9일에 어머니들이 찾아와 ‘놀면 뭐하냐’ 그러면서 다시 과외를 부탁하더군요. 그 길로 다시 과외를 시작했고, 90년에 양재동에 학원을 열었죠. 91년부터 학원을 본격적으로 키워가려는데 사고가 났죠.

(손 대표의 세 가족 교통사고를 말한다. 아들은 현장에서, 딸은 9개월 후 세상을 떠나지만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내는 몇 달 후 극적으로 회복됐다.)

Q.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군요?

인생에 더 이상 손해볼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들이 죽고 석 달이 힘들었죠. 자살 충동이 계속 생겼어요. 그런데 딸마저 가고 나니 갑자기 담담해지더군요. 딸아이가 새벽 4시 반에 사망했는데 11시에 장례를 치르고, 그날 오후 6시에 학원에서 강의를 했어요. 그 후로 본격적인 강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어쩌면 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주당 70시간의 수업을 했으니까요. 그러다 96년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Q.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사이 딸과 아들 하나씩을 더 낳았지만, 그때까지 늘 먼저 간 아이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죠. 어느 날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아득하더군요. 돈은 좀 벌었지만 내겐 잃은 것만 있더군요. 더구나 이 일(과외)조차 목적의식이 아니라, 단지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라 마음 한편으로 원죄의식이 있었어요.

Q. ‘원죄의식’이란 교육을 상업적으로 접근했다는 뜻인가요?

과외는 사회 불평등을 심화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돈 많이 받고 뒤에 있는 아이를 밀어 올리면 결국 누군가는 뒤로 밀려나죠. 사교육은 개인적 관계에서는 ‘선’이지만 사회적으로는 구조적 ‘악’이죠. 이것을 정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거죠.

Q. 철학적 고민에 빠진 셈인데, 고민의 결과는 어떤 것이었나요?

어머니의 소망이 목사이니 신학공부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내 삶의 내용이 목사는 아닌 것 같았고, 과외와 학원만으로 30억원은 넘게 벌었으니 그것을 종잣돈 삼아 사립학교라도 하나 세울까 했는데 그것도 안 되겠더군요.

Q. 과외로 번 돈으로 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신선한 발상인데요?

사교육에서 더럽게 번 돈으로 공교육에 투자하면 남 보기에 그림은 나오죠. 하지만 진짜 헌신이 아닌 ‘폼으로 사립학교 이사장을 하는 것은 얄팍한 수작이다. 내가 정말 많이 타락했구나’ 하는 반성이 들더군요.

Q. 그래서 장고 끝에 다시 학원으로 간 건가요?

잘할 수 있는 게 뭐냐? 자문해 보니 결국 강의더군요. 하지만 지금처럼 고액의 프리미엄 수업이 아니라 과목당 3만원짜리 소위 ‘막 단가’ 강의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Q. 박리다매로 ‘고액 강의로 인한 불평등도 해소하고 돈은 돈대로 벌 수 있다’ 뭐 이런 결론이셨군요. 그래서 ‘깨끗한 장사’는 어떻게 시작을 했나요?

당시 내가 운영하던 학원(진리와 자유학원)에서 월 5000만~6000만원의 수입이 나왔지만 포기했죠. 대신 대중강의를 위해 학원가를 찾아가 다른 학원에 나를 ‘강사로 써 달라’ 하고 원서를 들이밀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죠. 그때 원장들에게 ‘당신이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실패가 될 것임을 기억하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죠.

Q. 그래도 결국 학원 강사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지인에게 부탁해 강남의 한 학원을 소개받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97년 1월 2일 첫 대중강의를 시작했어요. 광고지 10만 장을 뿌리고 ‘손선생 통합사회’라는 타이틀을 내걸었죠. 그때 다섯 개 반을 모집했는데 겨우 3개 반에 총 8명의 학생이 등록하더군요. 그래도 확신했어요. 목숨을 걸고 강의했죠. 7월이 되니 2000명이 등록했어요. 8월이 되니 등록을 위해 전날부터 어머니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더군요. 그때부터 ‘손사탐’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요.

Q. 소위 재벌급 강사가 된 건데, 왜 굳이 메가스터디를 설립하셨나요?

97년부터 고민을 시작했어요. 지난 삶과 새 출발에 대한 고민을 하다 2000년에 기업을 만들었죠. 진리와 자유학원, 친구가 하던 다른 학원, 또 다른 학원 3개를 합병해 10년 안에 매출 1000억원을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그게 안 되면 ‘10년이 되는 2007년에 다시 고민하자’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2006년에 1000억원을 달성했죠.

Q. 일련의 과정이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로군요. 강의로 이름을 날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온라인 기업을 설립하겠다는….

그건 아니에요. 첫째는 그 이전 삶에 대한 반성이었고, 둘째는 앞으로는 ‘리더가 되려면 장사꾼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었고, 세 번째는 기득권을 버리고 사회적 부채의식을 덜겠다는 목적이었죠. 저에게 지금 자긍심이 하나 있다면 온라인 교육으로 인해 사교육의 불평등을 상당히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죠.

글=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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