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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책읽기]시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말.언어가 난무하는 시대. 말이 그대로 폭력이 되고 거짓이 되고 파탄이 되는 시대에 그래도 가장 순수하고 죄 없는 말은 시가 된다.

그래 시를 읽으면 말의 원초적 모습, 사물과 우리의 순백한 꿈과 만날 수 있다.

마치 주술과도 같이 좋은 시들은 말의 허황된 거품들을 빼고 모든 것들의 본디 모습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중견시인 안도현씨의 다섯번째 시집 '그리운 여우' (창작과비평사) 는 쉬운 시어와 천진한 감성으로 많은 독자들을 사로 잡으며 올 시단의 수확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는 차가운 세상의 따뜻한 국물 같은 것' 이라는 안씨의 시관을 따라 이 시집을 읽노라면 여울.송사리.눈발.살얼음등 작고 친숙한 자연과 만나게 되며 우리의 삶에서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따스함을 어느덧 느끼게 된다.

올 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인 김혜순씨의 '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사) 는 삶의 가장 아픈 부분을 면도날로 도려내듯 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시집이다.

삶의 비극적 정조를 낭만이나 감상으로 호들갑 떨며 치장하지 않은 진솔한 시어들과 이미지들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 크나큰 아픔이 어떻게 삶의 깊이와 아름다움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조작된 언어, 언어의 촘촘한 의미망에 걸려 허위적 거리는 사람들에겐 이시영씨의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 (솔출판사) 을 권한다.

3 - 4행의 짧은 시와 절제된 시어 그리고 그 사이의 넓은 여백에서 격조 높은 상상의 자유를 한껏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집에서는 지조 높은 선비의 기품을 나눠가질 수 있다.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서정주는 정히 부족 방언의 요술사다' 란 평을 듣고 있는 원로시인 서정주씨의 시집을 읽으면 한국시의 참맛을 그대로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어의 아름다운 쓰임새와 한국인의 마음결을 들여다볼수 있다.

서정주씨의 60여년의 시력을 한권에 간추린 시선집 '국화 옆에서' (민음사)가 최근 나와 서정주 시세계를 경제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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