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리셰감독 '크랙시티'…일거리 없는 젊은이들의 '분노' 영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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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실업자 5백만명,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용직까지 합치면 8백만명이 온전한 일거리가 없어 흐느적 흐느적 거리를 배회하는 나라. 그래서 노동으로 승화되지 못한 젊은 에너지가 무정부적인 저항의 형태로 뿜어져나오는 나라. 요즘 프랑스의 젊은 감독들이 자국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즐겨 쓰는 방식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얼마전 개봉됐던 마티유 카쇼비츠 감독의 '증오' .카쇼비츠가 27세때인 95년 만든 '증오' 는 서구에서 '증오세대' , 변두리를 뜻하는 '방리유' 세대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현대 도시의 젊은이들과 호흡을 맞춘 영화였다.

'크랙 시티' 도 '방리유 장르' 에 속하는 작품이다.

감독은 역시 20대인 장 프랑스와 리셰. 학교를 졸업하고도 어슬렁어슬렁 시간을 '죽이는' 또래들을 끌어모아 반 (反) 사회적인 영화를 만든 것이다.

파리 근교의 공단. 젊은이들은 실직과 빈곤 속에 희망을 잃고 패싸움을 벌이거나 여자들을 희롱하면서 빈둥거린다.

그런 어느 날 사소한 이유로 패싸움이 벌어지고 상대를 겁주기 위해 쏘았던 가짜 총이 화근이 돼 진짜 총싸움으로 번진다.

그러나 경찰이 개입하면서 싸움은 성난 젊은이들과 경찰이 화염병과 총으로 맞서는 상황으로 바뀌어 버린다.

줄거리와 화면 스타일만 보면 '크랙 시티' 는 컬러로 찍은 '증오' 라고 할 만하다.

'크랙' 이 정제된 코카인을 뜻하는 속어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원제인 'Crack 6T' 는 강도 높은 마약의 한 종류이다.

마약하면 영국 영화인 대니 보일 감독의 '트레인 스포팅' 을 떠 올릴 수 있겠다.

그러나 '크랙 시티' 는 '트레인 스포팅' 보다는 좀 더 우울하고 사색적이다.

그리고 '증오' 에 비해서는 기술적으로는 투박하지만 내용은 보다 혁명적인 것을 지향한다.

경찰과의 접전이 끊나고 젊은이들이 도로에 나뒹굴어져 있는 장면 위로 인권헌장 35조가 떠오른다.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유린할 때 폭동이란 사회 구성원의 가장 신성한 권리이며 필요불가결한 의무이다' .30년전 프랑스를 요동시켰던 '68혁명' 이 한 세대를 거쳐 젊은 감독들의 영화 속에서 되살아난 듯 한 느낌을 받게 된다.

〈95분.97년.미개봉작.베어엔터테인먼트〉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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