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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한숨 돌릴 때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쌀 있고 된장 있으면 살지. 동란때도 견뎠는데. ”

모처럼 서울과 통화 끝에 나온 얘기에 눈물이 울컥 솟았다.

나라가 흔들리니 마음 편한 이 하나 없고 사태의 긴박함을 알아차린 국민들도 이젠 남 탓하는 버릇을 버린 것 같다.

국가지도자 헐뜯는 일도 사치스럽고 미국을 비난하는 구태 (舊態) 도 더 이상 주목을 끌지 못한다.

모이면 나라 걱정이고 대화마다 나라 살 길 얘기다.

다만 지난날과 다른 점은 "설마 세계 11위 경제대국이 무너지는 것을 국제사회가 내버려 둘까" 하는 막연함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있는' 두려움이다.

성탄전야에 발표된 국제통화기금 (IMF) 과 미국을 비롯한 몇 나라들의 대한 (對韓) 긴급지원 결정이 나라의 부도 (不渡) 를 막고 연말고비를 넘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이같은 현실 앞에 우리가 무너지는 꼴을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라던 예측이 맞았다고 안도하는 관리들이 혹 있다면 이들의 낙관은 한달을 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설마하는 심정이 바깥에 전달될 때마다 나라에 대한 국제적 신인도 (信認度) 는 날개없이 추락한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가 나라의 경제현실에 대해 설명을 듣고 “이토록 상황이 어려운지 몰랐다” 는 반응을 보인 것조차 월가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판이다.

김대중후보의 당선을 미국 언론들이 한결같이 긍정적으로 평했지만 미국의 월가를 움직이는 이들은 당선자에 대한 의구심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한다.

따라서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얘기도 지금처럼 민감한 상황에선 파장이 크다.

나라안에서 전해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이젠 대통령당선자에게 말을 아끼라는 부탁도 사치스럽다.

말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깥 세상 돌아가는데 무심했던 정치투사 (鬪士) 들과 국수주의적 자만심에 가득 찬 일부 관료들의 무책임한 입부터 봉해야 한다.

그리고 신정부내 경제를 책임질 인사를 하루 빨리 선임해 한 입으로 국제사회 설득에 나서야 한다.

현재 한국을 지켜보는 월가의 반응은 두마디로 정리된다.

첫째, 어차피 바뀔 김영삼 (金泳三) 정부의 지시를 받는 어느 누구와도 대화할 필요가 없다.

신정권의 책임있는 재정 담당자와 얘기하겠다.

둘째, 문제의 근원인 한국기업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들이 바로 미국내 민간투자가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이들인데 납작 엎드려 신정권 눈치만 보고 있는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

미국내 민간 금융업체들의 고객인 한국기업 대표들이 월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전력이든, SK텔레콤이든 비교적 건실한 기업의 대표들이 미국을 찾아야 한다.

한편 한국정부의 단호한 조치가 시급하게 요구되는 이유는 미국내 정치일정과도 관련이 있다.

1월말 미 의회가 개원되면 IMF의 구제금융과 미 정부 지원에 쏟아붓는 미국민들의 세금이 과연 타당하게 쓰이고 있는가를 둘러싸고 엄청난 시비가 벌어질 것이다.

벌써부터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전문가 투고란에서 대한 구제금융을 둘러싼 논란을 싣고 있다.

미 의회내 공화당 인사들은 전통적으로 월가의 큰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 신정권에 대한 이들의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는 한 미 의회안에서의 논란은 한국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의회를 상대하는 미 재무부가 한국을 변호하는 데는 행동으로 뒷받침되는 우리의 지원사격이 절대적이다.

한편 미 의회의 주요 인사들을 직접 접촉하는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머지 않아 미국을 찾게 될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경제메신저들은 휴회중인 미 의원들의 지역구라도 방문해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는 데까지 신경써야 마땅하다.

연말고비를 넘겼다고 숨돌리려는 기미가 이곳에 전달돼선 안된다.

우리가 지금 긴박감을 버린다면 곧 이어 닥칠 또 다른 고비엔 속수무책이다.

길정우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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