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통치자 감시하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3면

누가 통치자를 통치할 것인가?” 플라톤이 2000년 전 물었던 이 질문에 시원스레 답하는 정치학자를 아직 보질 못했다. 민주주의의 근원적 딜레마이기에 그렇다. 서양에서는 이 문제를 삼권분립으로 풀었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된 경우 국회와 사법부가 대통령의 무한질주를 감당하기는 벅차다. 대통령 권한이 비교적 약한 ‘미국 민주주의’조차 이라크의 후세인을 제거하겠다는 부시의 종교적 신념을 말릴 수 없었다. 동양은 그것을 도덕정치로 풀었다. 어린 세자에게 군왕학을 가르치고 성군의 덕목을 수만 번 암송시켰다. 천리(天理)가 민의(民意)라는 게 도덕정치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군주들은 즉위와 함께 성학(聖學)을 버렸고, 왕의 스승들은 권력투쟁에 휘말렸다.

노무현 정권도 이 고질적 문제를 도덕정치로 풀고자 했다. 대통령 자신이 스스로 벌거벗었으니 그런 줄 알았다. 그의 신료들이 부자들을 공격할 때 정말 그런가 했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의 덫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정권 후원자들이 돈을 분무기로 살포했던 것이다. 드러난 모양새로 보면 불꽃놀이를 하듯 ‘돈꽃놀이’를 해댄 것처럼 느껴진다. 그 돈꽃놀이에 대통령도 한몫 끼었다는 것이다. 위험 징후가 없지는 않았다. 실세 몇몇이 구속될 때, 봉하타운이 건설될 때 여러 언론에서 예의 주시했고, 때로 경고도 했다. 많은 시그널에도 아랑곳 않고 돈이 뿌려졌다니, 배신감은 차치하고라도 촌스러움과 경솔함에 울화가 치민다.

‘통치자 감시하기’가 한국만큼 심각한 나라도 드물다. 통수권자의 부패 스캔들이 ‘5년 주기 행사’가 됐다. “한국정치는 5년 주기로 반드시 대통령 스캔들이 터진다”는 언명은 이제 정치학적 명제다. ‘반드시’에는 예외가 없다. 단언하건대, MB정권도 그럴 것이다. 재산을 환원한 대통령 자신은 아니라도, 이너서클에서 터져 나올 것이다. ‘도덕’은 ‘덫’에 걸리고야 만다.

‘덫’을 제거할 시무책(時務策)은 있는가? 덫의 으뜸은 바로 ‘5년 단임제’인데, 이걸 ‘4년 중임제’로 혁파하는 것이 첫 단계다. 5년 단임제는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증폭하는 제도다. 그것은 ‘시간제한 게임’이기에 강박관념을 강요한다. 초기 조각 3개월, 말기 대선 1년을 빼고 나면, 겨우 3년 반 동안 공적비를 세워야 한다. 그러니 무리할 수밖에 없고, 이너서클에 의존할밖에 도리가 없다. 부패 스캔들, 또는 돈꽃놀이가 이 와중에 나온다.

생업을 포기하고 선거캠프에 뛰어든 추종자들과 정권 공신들에게 어떻게든 보상해야 한다. 이들은 수백 개에 달하는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된다. 초기 1년 동안 ‘대한민국의 시간’은 임면(任免) 정치로 들뜨고, 후반 2년간은 이들의 ‘노후대책’ 때문에 어수선해진다. 청빈낙도를 업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선거캠프에 기웃거리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짧은 영광’에 만족할 사람은 없다. 후반기에 이들이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되는 이유, 돈으로 불꽃놀이를 하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멋쟁이 삼촌처럼 보이는 까닭은 정권 황혼기의 노을 때문만은 아니다. 유권자의 심판을 통해 자리 보전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보인다면, 권력 실세들은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이다.

이 첫 문턱을 어렵게 넘어선다면, 대통령과 주변을 감시하는 민정기관의 ‘이원화’는 다음 과제다. 청와대 민정실은 통치자의 삼촌 정도까지는 어찌해볼 수 있으나 대통령 자신을 포함한 ‘일촌거래’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대통령·아들·부인·형제를 탐사하기란 민망하고 난망했다. 그래서, 일촌거래만을 정기적으로 감사하는 ‘외부’ 민정실을 설치 운영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삼부요인과 시민단체가 추천하는 중립적 인사들로 구성하고, 정치압력에서 절대 자유로운 별동대여야 한다. 편파성이라는 내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그런 역할을 담당한 유일한 외부기관이었다.

그런데, 경제난으로 휘청거리는 이때 누가 개헌에 가름하는 이 미묘한 문제를 꺼낼 것이며, 미운털이 박힌 방송사의 앵커가 말문을 접고 하차하는 이때 누가 감히 이 ‘외부 민정실’을 주청할 수나 있을까?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