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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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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2008년 한 해 동안 2120만 명이 찾아간 곳이 있다. 올해 야구가 목표로 정한 ‘560만 명 관중’의 네 배 가깝다. 이곳은 경마장이다. 지금은 경마공원이라 불리는 곳.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드리워진 곳. 즐겁게 놀러 왔다가 갈 때는 빈손으로 가는 곳. 나도 가끔 가는 곳.

이들 경마팬이 산 마권 총액은 2008년에 7조4200억원. 이 중 27%를 마사회가 뗀다. 이 돈은 세금(1조4000억원)을 비롯해 축산기금, 농어촌 기금에 할당되고, 마사회 직원도 먹여 살린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경마 팬들은 괜히 죄스럽다. 항시 돈을 잃기 때문이다.

증권의 수수료는 0.1%, 카지노는 5~7%인데 경마는 27%니까 그 불리함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이를 일찍이 터득한 서양 사람들은 동전이나 걸고 자기가 좋아하는 말에 환호하는데 우리는 아직 안 된다. 홍콩만 해도 매출을 올리려고 고액 베팅자를 특실에 모시고 경호까지 해 주는데 우리는 고객들의 신분 확인 등 매출을 줄이려는 각종 규제안까지 내놓았다. 다 경마 팬들의 만수무강을 위해서일 게다.

그러나 경마 팬을 정말 도와주려면 거의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27%’를 줄이면 된다. 팬들은 돈을 덜 잃게 되고 경마는 마사회의 구호대로 ‘국민 레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국회도 가끔 경마로 인한 서민들의 피해를 질책하면서도 고리채 비슷한 27%를 줄여 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확보된 세수를 줄이면 골치 아프니까 본질은 피해 간다.

사실은 그 27% 때문에 불법 사설경마가 성행하고(매출 5조~10조원 추산), 이는 다시 경마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등 그 피해는 모두 ‘고객’ 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게다가 이 충성스러운 고객들은 대접받기는커녕 은근히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경마라는 창에는 우리 사회의 이중성과 위선이 빗물처럼 흐른다.

이런 경마를 왜 하나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사실은 재미있어서 한다. 경마는 추리와 분석의 게임이고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제격이다. 시비스킷이란 불굴의 명마는 경제공황으로 상처받은 미국민들을 열광시켰고 세계 제일의 마주이자 경마광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의 기적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영국 여왕이 패션을 뽐내며 등장하던 엡섬 더비-경마가 복사꽃처럼 환한 곳도 많다.

20여 년 전 나는 자동차로 호주를 여행하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음식점도 문을 닫고 수퍼마켓마저 문을 닫았다. 웬일이냐 물었더니 오늘 이 시골 도시에 경마가 열린다고 한다. 밥은 어디 가서 먹느냐고 했더니 경마장에 가보란다. 내가 맨 처음 경마를 접한 사연이다. 그 후 경주마도 갖게 됐다.

화창한 봄날 경마장에 갔다. 저마다 책을 한 권씩 들고 예시장에 나온 말을 주시하며 눈독을 들이고 있다(경마장에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도, 칠십 할머니도, 공부와는 담을 쌓았을 것 같은 우락부락한 아저씨도 모두 열공 중이다.) 잘 아는 은퇴 부부가 나에게 유력한 복병마를 추천한다. 밤새 공부한 그의 책은 온갖 색깔의 메모와 밑줄로 색동저고리처럼 알록달록하다. 이들이 건 돈은 딱 천원이다. 드디어 말이 뛴다. 말굽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환호성이 터진다. 주머니를 털어 가는 ‘27%’는 벌써 잊어 버렸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