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의 중국산책]옛 미운 앙금을 털어 버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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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수교 당시 이상옥 외교부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첸치천 전 외교부장

1988년 중국과 대만의 양안 외교가엔
이른바 '양전(兩錢)' 시대가 막을 엽니다.

한푼 두푼하는 그런 몇푼짜리 시대가 아니라
중국에서는 첸치천(錢其琛)이 외교부장으로,
대만에서는 첸푸(錢復)가 외교부장에 오르며
두 첸씨 성의 외교전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그러나 이 양전 시대의 승패는
4년 뒤인 1992년에 적나라하게 갈립니다.
한국이 대만을 등지고 중국과 수교하면서지요.

첸푸 선생의 비통과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고 합니다.
'한국의 배신을 잊지 말자'는 말 속엔 서릿발이 깔렸구요.
그런 첸푸가 2005년 회고록을 냈습니다.

당시 한국과 대만의 단교 과정을 어떻게 다뤘을까,
호기심 차원에서 두 권으로 된 회고록을 구입했지만,
첸푸의 회고록은 1988년까지로 머무르고 맙니다.

본인 경력의 가장 아픈 부분이기도 한
한국과의 단교 부분은 훗날로 미룬 듯 합니다.

그 첸푸가 18일 중국 하이난다오 보아오에서 개막된
아시아판 다보스 포럼이라는 보아오 포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대만의 양안공동시장기금회 최고 고문이라는 신분으로
대만대표단을 이끌고 보아오 포럼에 참석한 것이지요.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 주임을 맡고 있는 전 중국 외교부 부부장
왕이와 만난 것은 물론 18일엔 원자바오 총리와도 만났습니다.

눈길을 끄는 건 첸푸를 향한 원자바오 총리의 말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즐겨 쓰는 '16자' 표현으로 심경을 전달하고 있네요.
'面向未來 捐棄前嫌 密切合作 携手幷進'

'미래를 향해 옛 미운 감정을 떨쳐 버리고
아주 가까이 협력해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자'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 중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옛 미운 감정을 떨쳐 버리자'는 것입니다.
중국과의 수교, 대만과의 단교 문제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한 측면이 큽니다.
그러나 아직도 적지 않은 한국 사람들은 당시에
'새 친구를 사귀기 위해 옛 친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제 첸푸 선생은 오랜 그 자신의 투쟁 대상이었던 대륙을 방문해
협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첸푸 선생과 한국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회복됐는지 모르겠네요.
'捐棄前嫌'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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