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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설마리 전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0호 33면

영국 런던 외곽에 있는 윈저성의 로열 아파트먼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가족이 사는 곳이다. 여왕이 성을 비우는 날에는 일반 관람을 허용한다. 3년 전 이곳에 있는 군사기념물 보관실을 찾았다가 ‘임진(Imjin)’이라고 적힌 배너를 발견했다.

6·25전쟁 당시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235고지와 인근 계곡에서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벌어진 전투의 기념물이다. 한국에서는 ‘설마리 전투’로, 영국에선 ‘임진강 전투’로 각각 부른다. 영국군 29보병여단 4000여 명이 서울로 향하는 중공군 63군 소속 7만여 병력의 전진을 나흘간 저지한 전투다.

영국군 3개 대대 중 글로스터셔 대대의 피해가 가장 컸다.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워털루 전투에도 참가한 이 유서 깊은 부대는 설마리에서 붕괴 직전까지 갔다. 전투 중 58명, 탈출 중 30명이 전사했다. 대대장 카네 중령을 포함한 나머지 530명은 대부분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됐다. 포위망을 빠져나간 병력은 63명에 불과했다.

언뜻 패전으로 보이지만 영국에선 ‘영광의 글로스터셔’라며 이들을 칭찬한다. 첫째 이유는 불굴의 투혼이다. 235고지에 포위됐던 글로스터셔 대대는 총알과 박격포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싸웠다. 중대장으로 참전한 패러호크리(1924∼2006) 대위는 중공군 피리 소리에 맞서 나팔수에게 “진격나팔을 불어라”고 명령했다. 나팔수 부스 하사는 후퇴 신호를 제외한 모든 레퍼토리를 연주하며 전우들을 격려했다.

둘째는 이 작은 전투가 제2의 1·4후퇴를 막았다는 것이다. 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지만 중공군은 속공으로 재점령한다는 작전 아래 4월 춘계 공세에 나섰다. 하지만 영국군에 발목이 잡히면서 작전은 무산됐다. 그동안 유엔군은 서울 북부에서 반격 준비를 마쳤다. 중공군은 그 뒤 다시는 대대적인 공세를 펴지 못했다.
셋째는 지휘부의 희생정신이다. 대대장 카네 중령은 25일 오전 6시 배터리가 거의 떨어져 가는 무전기를 통해 철수 명령을 받았다.

“자력으로 포위망을 뚫어라. 불가능하다면 투항하라. 선택은 대대장에게 위임한다. 행운을 빈다.”

그는 중대장들에게 탈출해 의정부로 집결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군의관·군목·위생병과 함께 남아 부상병을 지켰다. 포로가 됐던 그는 휴전 후 석방돼 영국 최고의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다.

패러호크리는 2년간의 포로 생활 뒤 귀환해 나중에 중장까지 승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북유럽사령관까지 지내고 82년 퇴역한 그는 전투 경험을 담은 다양한 저서를 펴냈다.

생전에 설마리 전투 기념행사로 종종 방한하던 그를 10여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전투 경험만큼 저서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참전용사 150명이 지금 한국을 방문 중이다. 그들을 포함한 참전용사들의 경험을 다양하게 기록해 둬야 하지 않을까. 내년이면 6·25 발발 50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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