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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 노벨상 한·일전 ‘0대 13’에는 왜 불끈하는 사람이 없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0호 04면

3월 8일부터 이달 12일까지 중앙SUNDAY에 4회에 걸쳐 보도한 ‘일본 과학의 힘, 노벨상 수상자 연쇄 인터뷰’를 하게 된 동기는 간단했다.

같은 기간 열렸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도 확인했듯 한국은 일본에 무한한 경쟁의식이 있다. 이기지 않고는 좀처럼 잠을 못 이룬다. 한국 국민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하는 가장 쉽고도 강력한 수단은 ‘일본 이기기’다. 그런데 13대0이라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 스코어에 억울해하고 불끈하는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거 뭐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건 아닌가. 그런 소박한 생각에서 취재는 시작됐다. 이웃 나라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입을 통해 한국의 기초과학이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는 힌트를 찾아보자는 게 일관된 키워드였다.

그러나 취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쳤다. 지난해 노벨상을 수상한 대상자를 중심으로 편지를 보내고 접촉했지만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바쁘다”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는 응한 적이 없다” 등 온갖 핑계로 거절당했다. 오기가 발동했다. 먼저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69) 교토산업대 교수에게 재차 장문의 편지를 띄웠다.

“한국에도 자신의 꿈과 인생을 걸고 오늘도 묵묵히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와 젊은이가 많다. 마스카와 선생께서 그동안의 경험담과 과학자로서의 비전과 철학을 전달해 주면 그들에게 큰 힘이 된다. 그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가치가 될 것이다. 또 혹시 아는가. 당신의 인터뷰를 계기로 과학도가 된 한국의 젊은이가 먼 훗날 노벨상을 받고 수상 소감에서 당신의 이름을 이야기할지.”

일주일 후 마스카와 교수에게서 답신이 왔다. “교토로 와라.” 주어진 시간은 20분. 그러나 ‘과학’을 이야기하는 그의 열정은 20분에 끝나지 않았다. ‘덕분에’ 인터뷰는 50분 이상 계속됐다.

미국에 거주하는 시모무라 오사무(下村脩·81) 교수와는 e-메일 인터뷰가 극적으로 성공했다. 해파리가 움직일 때마다 녹색 빛을 내는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 19년 동안 해마다 여름만 되면 미 서부 해안을 찾아 85만 마리의 해파리를 직접 잡았다는 그의 이야기는 연구자의 ‘집념’ 그 자체였다.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고바야시 마코토(小林誠·65) 교수는 인터뷰까지 꼬박 100일이 걸렸다. 그래도 끈질기게 버텨 1시간 동안 그의 과학에 대한 열정을 들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지난해 일본에서 노벨상을 받은 4명 중 한 명의 미국 국적자(난부 요이치로·88)를 빼고는 전원 인터뷰에 성공한 셈이다.

지난해 수상자 외에 200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83) 도쿄대 명예교수를 특별 인터뷰한 것은 ‘일본 과학계의 거두’라 불리는 그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그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묻고 싶었던 건 아시아의 젊은이 200명이 매년 아시아의 특정 국가에 모여 노벨상 수상자들과 일주일간 합숙하며 토론하는 ‘아시아 사이언스 캠프(ASC)’에 왜 한국은 빠져 있는가였다. 올해로 벌써 3회째가 되는데 한국에선 그런 게 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시바 교수는 나를 보자마자 묻기도 전에 답부터 꺼냈다. “실은 ASC의 이사회 멤버로 한국 과학자를 모시려 했는데 한국 과학자들끼리 상호 비방하는 바람에 그만뒀다”는 것이었다. ASC의 이사회 멤버는 9명인데, 인도를 빼고는 모두 일본·대만·중국의 노벨상 수상자로 채워져 있다. 한마디로 쟁쟁한 구성이다. ‘21세기 과학의 아시아 시대’를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내부 분열로 이런 기회를 박차고 있다니…, 한숨만 나왔다.

이번 연쇄 인터뷰에서 수상자들이 이야기한 공통된 키워드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프로야구를 출범시켜 20여 년 만에 일본을 따라잡았듯 기초과학도 꾸준하고 화끈한 투자 없이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란 생각으론 노벨상 문턱에도 가기 힘들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국 기초과학의 미래를 낙관하면서도 “정부나 과학자가 계속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단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13대0으로 앞서고 있는 일본은 올해를 ‘기초과학 강화의 해’로 선포하고, 노벨상 수상이 가능한 과학 인재를 대거 육성하는 민관 합동의 별도 조직까지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뻔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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