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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미은행의 '잘못된 다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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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사계절이 뚜렷해 살기 좋다던 나라가 점차 계절을 잃고 인간의 삶도 시들해 간다. 동투.춘투.하투 등 사시사철 이어지는 파업열기가 일터를 솥뚜껑처럼 달구는 통에 국내경기는 냉각되고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한미은행의 파업은 노동계가 시기를 헛짚고 상대를 어설피 알고 섣불리 크게 판을 벌인 '잘못된' 다툼이다. 승전비결은 시기와 상대의 선택에 있는데 말이다.

시기선택이 왜 잘못인가? 상대가 여유 있을 때 달래야 얻기 쉽다. 선진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노사분규가 호황기에 늘어났다가 침체기에 줄어드는 까닭은 그래서다. 올해 들어 세계경제가 회복되고 있으나 아시아 국가 중 한국의 회복세가 꼴찌다. 외형상 수출부문만은 호조이지만 내수부문은 침체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 잘 나가는 수출 기업들도 채산성은 악화하고 있다. 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고 있고 움츠린 가계들도 지갑 열기를 조심하고 있다. 더구나 7월 1일부터 주5일 근무제 확대실시로 기업의 비용부담은 그만큼 늘었다.

붉은 띠.까까머리의 투사 모습에서 정장모습으로, 막무가내 옹고집에서 균형된 책임의식을 공유한 성숙된 사회인으로의 노동계 변신을 바라며 지난 총선 때 시험 삼아 국회진출을 허용한 다수 국민의 기대를 의식해야 한다. 국민은 그들의 변함없는 이기적 집단행동에 식상해 조만간 철퇴를 내릴 것이다. 노동계에 열화 같은 성원을 보냈던 청년들이 노조의 제 속차림 때문에 자신이 실업자로 머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순간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더구나 이번 투쟁은 이라크 파병과 같은 정치이슈를 내걸고 산별 노조가 하위조직을 지시하는 모양새가 되고 있다.

한미은행의 경우 노조가 내건 11개 요구사항에는 합병에 따른 상장폐지 철회, 독립경영 보장 등 협상대상이 아닌 경영권 관련 사항이 포함돼 있고, 특별상여금과 고용안정 요구도 지나치다.

금융노련이 하투의 초점을 한미은행으로 둔 것은 상대를 만만하게 여기고 덤빈 것으로 보인다. 일부 국민의 반미 감정을 등에 업자는 속셈이 깔려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결코 만만치 않다. 이미 노조 측이 협상에 임하는 은행장의 뚝심과 전산망의 정상가동에서 난감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국외관찰자가 보기에도 자신도 심판대에 올라 있는 경영진의 양보 여지가 무척 좁아 보인다.

환란 이후 외국펀드에 넘어간 국내은행들이 몇 개 있었지만 그들은 선진기법을 도입하거나, 관치금융 버텨내기로 차별화하는 데 실패했다. 너무나 쉽게 한국화해 국내은행들에 모범이 되지 못했다. 이번 한미은행을 합병한 씨티은행은 벌써부터 국내은행들의 최고경영자(CEO)들이 긴장할 만큼 경쟁촉진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 그래야 국내금융계의 발전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씨티 측에서는 합병 초기에서부터 선진국의 '모범적' 관행을 관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하겠다.

우리 금융은 프로들의 세계인 금융계를 전투적 노조에 점령당하고 있는 예외적 사례다. 새 은행은 어떻게 합병하고, 구조조정하고, 경영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할 책무를 떠맡은 셈이다. 이에 성공하면 새 은행은 국내 은행계의 선두자리를 넘보는 위협적 존재로 부상할 것이고, 좌절하면 또 하나 미국자본의 볼품없는 한국화 은행으로 전락할 것이다. 천시지리(天時地利)를 무시하고 경적(輕敵)하고 덤빈 노조이지만, 은행의 자산이 사람인 것을 어찌하랴. 그들을 담금질하며 보듬고 이끌어야 할 책무가 경영진에 있다. 경영진은 노조에 정직.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고 노조는 요구사항을 복지후생에 국한해야 한다.

정부는 그동안 노동시장의 불법적 행동을 엄단하겠다는 공언을 거듭해 왔다. 빈말인지 아닌지, 이제 한미은행 사례가 시금석이 될 것이다. 여기서 원칙이 흐트러지면 외자유치고, 동북아 허브고 모두 물 건너가고 만다. 사태는 그만큼 심각하다.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