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필요한건 '고통의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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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찰스 디킨스의 소설 중 '두 도시 이야기' 라는 명작이 있다.

최근 한국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는 '두 도시 이야기' 가 아니라 '두 나라 이야기' 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즉 절대절명의 위기와 불안 속에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벼랑길로 달려가고 있는 '일반 국민들의 나라' 와 이같은 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심한 이전투구와 장밋빛 약속으로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는 '정치권의 나라' 라는 두 나라가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이번 대선은 처음부터 21세기 비전과 전략에 대한 경쟁이 아니라 추악한 이전투구와 폭로전으로 점철돼 왔다.

과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국가 전체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최근의 위기 이후엔 무언가 달라져야 당연하다.

그러나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회창 (李會昌) 후보의 두 아들 병역문제,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제기된 이인제 (李仁濟) 후보의 병역기피문제, 김대중 (金大中) 총재에 대한 색깔론 등일 뿐이다.

이같은 사태는 결국 이회창대표의 둘째아들이 급거 귀국해 공개적으로 키를 재는 소동으로 이어졌고 이같은 소동에도 불구하고 이를 둘러싼 공방은 계속되고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최근의 위기에 대한 해결방안 등 각 후보 진영이 내놓고 있는 장밋빛 약속들이다.

이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누가 당선되든 최근의 위기는 가벼운 감기 정도로 쉽게 고쳐지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만사가 잘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같은 명의들을 한명도 아니고 3명씩이나 가지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정말 복받은 국민들이라고 자축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필요가 있다.

또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장밋빛 약속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사태에 대한 각 진영의 대응과 처방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들이 현재 위기의 폭과 규모, 그리고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나아가 현 정권으로부터 '고장난 한국주식회사' 라는 거대한 부실기업을 상속받을 수밖에 없는 차기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최우선의 자질이라고 할 수 있는 위기관리 능력을 조금이라도 갖추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방만한 차입경영 등 한국기업의 구조적 문제에 있다.

그러나 김영삼 (金泳三) 정권의 무능력, 우리 정부.정치권의 정책의지와 정책능력에 대한 국제금융권의 불신 역시 중요한 원인이 됐다.

바로 이같은 현실을 목격하고도 각 후보 진영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채 집권하면 국제통화기금 (IMF) 과 재협상하겠다느니, 2년내에 문제를 다 해결하겠다느니 하는, 유권자들의 귀에 듣기 좋은 감언이설만 늘어 놓음으로써 국제시장의 불신을 가속화하고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

국가를 생각한다면 설사 재협상 의지가 있더라도 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 그같은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다.

오죽했으면 외국 언론이 우리 대선주자들을 귀와 눈과 입을 막고 현실을 회피하고 있는 무책임한 정상배들로 묘사하며 힐난했겠는가.

김영삼정권이 우리 경제를 가사 (假死) 상태에 빠뜨렸다면 대선주자들이 이를 확인사살하고 있는 꼴이다.

미국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던 20년전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는 '제로섬 사회' 란 저서에서 궁지의 미국 현실을 외면한 채 장밋빛 환상을 제시하는 정치인들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재건을 위해 고통과 희생이 불가피함을 역설한 바 있다.

또 최근 집권한 프랑스 사회당의 조스팽 총리는 자신의 정책이 가져다 줄 사회적 고통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대 (對) 국민 설득을 통해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허황한 장밋빛 약속이 아니라 솔직한 '고통의 약속' 이다.

대선후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에 대한 어설픈 진단과 달콤한 포장술이 아니라 냉철한 위기의식과 위기관리 능력이다.

허황한 약속과 이에 따른 엄청난 실망.좌절은 한번으로, 즉 김영삼대통령만으로도 충분하다.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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