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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국가보안법 개폐작업 나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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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상생의 정치를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일단 덮어두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국가보안법 문제가 한 예인데, 이 법을 그대로 두어서는 상극의 기운이 멈출 날이 없고 상생의 정치도 빈말로 끝나기 십상이다. 그러니 하루 빨리 없애야 하는데, 다만 없애는 과정에서도 상생이 주안점이 될 필요가 있다.

법률가도 아닌 내가 구체적인 조문의 시비를 여기서 가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떠나 법리만으로 따질 때 국가보안법이 매우 기형적인 법률인 것만은 분명하다. 무릇 법률이 죄를 정함에 있어 지나치게 모호하고 포괄적이거나 벌을 주는 당국자에게 과도한 재량과 특전을 부여할 경우 법률로서의 격을 잃게 마련인데, 국보법이 바로 그런 법인 것이다.

*** 상생의 시대 범법자 자꾸 만들어

더구나 시대상황이 바뀌어 남북화해가 진전되고 직.간접의 민간교류가 빈번해진 오늘, 법률상 반국가단체 구성원인 북녘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고무.동조하는 행위는 수많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저지르기 쉽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아래 사안별 면죄부를 받아낸 경우를 빼고도 범법자가 수두룩해지는 실정이다. 이래서야 한반도에 상생의 길이 어떻게 열릴 것이며, 국민이 권력자의 눈치를 안 보는 당당한 시민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국제사회에서 일류국가 대접을 받는 일 또한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17대 국회의원 대다수가 국가보안법의 개폐에 찬동하고 한나라당에도 동조 의원들이 적지 않다는 어느 설문조사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다. 하지만 정작 개폐작업이 곧 이루어질지는 분명치 않다. 이 문제에서는 무엇보다 집권여당의 자세가 중요한데,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국보법 개폐를 최우선 과제가 아닌 '완급을 조절할' 개혁과제로 설정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나라당에도 동조자가 적지 않으니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결행할 수 있다는 느긋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을 두고 느긋한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일종의 도덕적 해이가 되려니와, 현실인식 또한 안이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선거법 재판 등으로 각당의 의석수에는 변화의 여지가 많은 데다 민심의 움직임은 더욱 유동적이어서 여당 지도부가 마음먹어도 못해 내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국가보안법 같은 해묵은 난제는 할 수 있을 때 즉시 해버려야 된다. 이 문제만 척결해도 노무현 정부와 17대 국회는 아무 것도 안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갔다는 지탄은 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완급을 조절할 게 아니라 빨리 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개폐를 조절해야 한다. 나는 '개'보다는 '폐'가 원칙에 맞는다고 믿는 편이지만, 여야에 걸쳐 의원들의 폭넓은 찬성을 얻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당장 전면폐기 쪽으로 그런 기운을 모으기 어렵다면 핵심 독소조항들을 제거하는 일이라도 빨리 하는 것이 낫다. 다수당의 지도부가 정확하게 형세판단을 하고 결연히 움직여야 할 대목이다.

*** 여당 태도는 지나치게 안이

무엇이 핵심 독소조항이냐에 대해 물론 견해차가 있을 것이다. 동의의 폭을 넓히다 보면 개정 대상이 '찬양.고무.선전' 같은 비교적 경미한 죄목이나 북측 정권에 대한 반국가단체 규정처럼 누가 보나 현실에 안 맞는 조항들로 국한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더 무시무시한 조항들이 많이 남는다 해도 대부분은 형법으로도 다스릴 수 있는 죄목이다. 오히려 '경미'하거나 거의 '사문화'되었다는 조항이야말로 권력자에게는 국가보안법만이 안겨주는 달콤한 매력이요, 말하자면 국가보안법의 꽃이다. 이것만 사라져도 국보법을 고수하려는 집념은 한풀 꺾이기 십상이다.

이렇게 먼저 그 단맛을 빼버린 뒤에 완전폐기는 다음 단계로 미루자는 '완급 조절'이라면 그도 일리있는 방도일 듯싶다. 그러나 개폐작업 자체는 상생정치의 첩경이며 시급한 민생현안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평론가

◇약력:미국 브라운대 졸업, 하버드대 영문학 박사, 서울대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인, (재)시민방송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