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반환 7주년] '반중국 정서' 가라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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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1일로 7년이 지났다. 일국양제(一國兩制)는 성공한 것일까. 한 나라에 두 체제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중국과 홍콩의 겨루기가 흥미진진하다.

"시위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홍콩 반환 7주년에 맞춘 7.1 가두 시위엔 참가하지 않겠다."

지난달 29일 홍콩 시내에서 만난 택시기사 팡정방(方正邦)은 심드렁했다.

그는 50세의 노총각이다. "재산도 없고 월 수입도 1만 홍콩달러(약 150만원)에 불과한 가난뱅이에게 시집올 여자를 찾지 못했다"는 신세타령만 해댔다.

그는 지난해 7월 1일 50만명이 모인 가두 시위에 참가했다. 3년간의 장기 불황, '홍콩판 국가보안법(국가안전조례)'제정 움직임,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확산 등으로 누적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날이다. 그날엔 '홍콩 독립론'까지 거론됐다. 홍콩식 일국양제가 벼랑 끝에 섰던 셈이다.

이런 반중(反中) 분위기는 1년 만에 달라졌다. 중국의 도움으로 경제가 호황으로 돌아선 덕분이다.

지난해 한때 마이너스였던 국내총생산(GDP)성장률은 올 상반기 중 8%를 넘어섰다. 8.3%까지 치솟던 실업률도 7%대로 떨어졌다. 부동산.주식 시장은 30~40% 반등했다.

민주화 바람을 잠재우기 위한 중국의 '경제카드'는 주도면밀했다. 우선 홍콩 관광 자유화를 내세웠다.

거대한 중국 내 관광시장의 물꼬를 조금 넓게 열어 홍콩의 관광수입을 늘려준 것이다. 곧이어 ▶홍콩~주하이(珠海)~마카오를 잇는 해상대교 건설▶중국.홍콩 간 무관세 협정 체결▶중국 내 홍콩인의 창업.취업 기회 확대 등의 조치가 줄줄이 이어졌다.

홍콩이 필요한 것은 다 주겠다는 자세다.

반면 정치적인 고삐는 바짝 조였다. 지난해 행정수반.입법의원에 대한 직선제 요구가 제기되자 "선거 제도를 결정할 권한은 중앙정부에 있다"며 일찌감치 쐐기를 박았다.

중국 정보요원들의 감시 활동도 날카로워졌다. 목표는 여론 주도층과 민주파다. 이들에게는 회유와 탄압이 집중됐다. 효과는 있었다.

대표적인 민주파 인사 류첸스(劉千石)의원이 "공산당도 잘하면 표를 줄 수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 굳게 뭉쳤던 민주파 대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셈이다. 반환 초기의 경우 중국에 비판적인 신문이 10여개에 달했지만 지금은 신보(信報)와 빈과일보(果日報) 정도만 남았다.

그러나 중국의 홍콩 길들이기가 끝까지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우선 민주파의 결속이 여전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록 약간의 동요는 있었지만 민주파 정당.단체의 기개는 여전하다.

이들은 전체 60석 중 30석을 직선으로 뽑는 9월 입법원 선거에서 28석을 얻겠다는 야심만만한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7.1 시위 구호의 강도를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달라(還政於民)'에서 '민주 쟁취, 자유 수호'로 한 단계 낮췄다. 가능한 한 넓게 지지층을 확보하자는 전략이다.

민주당의 양썬(楊森)주석은 "천안문 사태 15주년을 맞아 지난달 4일 열었던 집회에 8만여명이 참가했다"며 자신만만이다.

민주화에 대한 홍콩인들의 염원도 간단치 않다. 정치 문제에는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홍콩인들이지만 민주화에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에는 '홍콩이 중국식 일당 독재와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이 깔려 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창안해 홍콩에 처음 적용했던 일국양제는 본격적인 시험을 치르고 있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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