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시장 왜 꽉 막혀있나…돈 풀어도 종금사엔 안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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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융대란' 이 자칫하면 실제상황으로 닥쳐올 판이다.

조짐은 지난 2일 재정경제원이 9개 종금사에 아무 예고없이 영업정지명령을 내릴 때부터 나타났다.

재경원은 그전에 종금사의 어음에 대해 지급보증을 약속했었다.

은행들도 이를 믿고 종금사에 자금을 지원해 줬다.

그러다 졸지에 돈을 물리고 만 것이다.

정부의 지급보증은 사실상 허언 (虛言) 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은행들은 종금사들에 대해 일제히 콜자금 공급을 끊었다.

종금사로부터 인수한 기업어음 (CP) 도 만기때 꼬박꼬박 상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건질 수 있을 때 건져보자는 것이다.

자연히 정상영업을 하던 종금사들에 자금압박이 가해졌다.

종금사들은 만기가 돌아온 돈을 콜시장에서 빌려 막아야 하는데 이를 못하게 된 것이다.

지난 4일, 8개 종금사가 1조9천억원을 막지 못했다.

미결제규모는 더 늘어나 6일에는 10개 종금사가 4조원을 제때 막지 못했다.

하루만 더 막지 못하면 10개 종금사가 무더기로 부도를 낼 지경이었다.

재경원이 은행에 협조를 외쳐도 응해주는 곳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주면 물릴 것이므로 줄 수가 없다" 는 반응들이었다.

한마디로 '신용경색' 이다.

대한종금 안상준 (安相駿) 이사는 "정부.은행.종금사등 모든 당사자간에 불신이 해소되지 않아 자금시장이 마비됐다" 고 말했다.

돈은 이미 잔뜩 풀렸다.

그래도 실세금리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한은이 아무리 은행에 돈을 풀어도 종금사에 흘러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한은법을 고쳐서라도 한은이 종금사에 직접 돈을 주도록 하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금융기관들은 이제 '자급자족' 체제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량.부실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

조금만 삐끗하면 누구든지 쓰러지는 상황이다.

다행히 6일 오후 늦게 청와대.재경원.한은이 총동원돼 은행의 자금지원을 종용,가까스로 결제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로써 자금시장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금융기관 상호간, 또 정부와 금융기관간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이 이 지경이니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금융기관과 기업이 공멸 (共滅) 위기에 부닥친 것이다.

그동안 어렵다, 어렵다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영업정지 종금사들과 거래하던 기업들이 큰일이다.

이들 종금사는 지난 2일 이후 만기가 닥친 대출을 열흘간만 연장해주고 있다.

따라서 빠르면 오는 12일부터 거래기업의 자금난이 본격적으로 닥치는 셈이다.

또 이들에게 결제자금을 예금해둔 기업들은 돈을 찾지 못해 이미 부도위기에 몰려 있다.

은행들도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대출을 줄이고 있다.

게다가 한은은 국제통화기금 (IMF) 과의 합의로 돈줄을 죄야할 판이다.

대우경제연구소 정유신 연구위원은 "이대로 가면 결국 기업도산과 금융기관 부실화의 악순환이 다시 이어질 것" 이라고 말했다.

남윤호.김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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