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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정답은 없다, 인생은 그저 흔들릴 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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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06면

영화 ‘더 리더’의 바람이 만만찮다. 관객 수 36만. 그 수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가슴 먹먹해지는 영화. 아름답도록 쓸쓸한 영화. 입소문이 무섭다. 특히 30대 후반 이후 중년 여성들의 호평이 이어진다. 혹자는 30대 여성과 10대 소년의 정사 장면에 초점을 맞춰 그 이유를 분석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년 여성의 취향이 그리 단순할 리 없다.

영화 ‘더 리더’, 스티븐 달드리 감독, 케이트 윈즐릿·랄프 파인즈 주연

서른 여섯 살의 한나(케이트 윈즐릿)와 열다섯 살 소년 마이클(데이비드 크로스)의 격정적인 베드신은 영화 전반부의 주요 볼거리다. 목욕 장면도 잦고 노출 강도도 세다. 자칫 그렇고 그런 에로영화로 비춰질 법하다.

하지만 벗고 나온다고 다 에로영화는 아니었다. 스토리의 힘이 정사 장면의 격을 높였다. 성(性)을 비롯한 세상에 눈떠 가는 한 소년의 성장영화이자, 전쟁세대와 전후세대 사이의 갈등을 그린 시대극으로서 ‘더 리더’의 가치는 매겨진다.

영화의 원작은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 1995년 출간된 이래 40개국에서 번역본이 나왔으며, 미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팔렸다. 우리나라에선 영화 개봉과 맞물려 새삼 인기를 끌고 있다. “5년 동안 3000부 정도 나갔던 책이 지난 한 달간 2만 부 이상 팔렸다”는 게 2004년 한국어판을 출간한 출판사 이레의 설명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감독 스티븐 달드리는 원작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마이클과 한나의 인연은 열병에서 시작됐다. 성홍열에 걸려 길거리에서 구토를 하고 있던 마이클을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한나가 도와준다. 1958년 서독의 노이슈타트에서였다.

그들의 사랑은 내내 열병이었다. 한나는 마이클에게 사랑을 나누기 전에 책을 읽어주기를 요구한다. 문맹. 한나는 글을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한나를 마이클이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8년 뒤, 나치 전범 재판정에서였다. 법대생으로 방청석에 앉은 마이클은 나치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했던 한나가 종신형을 선고받는 과정을 지켜본다. 마이클은 한나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었는데도 끝까지 외면한다. 왜였을까. 과거 연인이었던 관계를 밝히기 싫어서였을지, 아님 나치 전범을 감쌀 수 없다는 엄정한 도덕성 때문이었을지, 분명치 않다.

영화를 끌고 가는 키워드는 마이클의 순정과 한나의 자존심이다. 10대의 마이클은 한나의 몸에 빠져들면서 빛을 냈다. 이후 평생 다른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못했다. 당연히 결혼생활도 짧았다. 장년기 이후의 마이클을 맡은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주인공 랄프 파인즈는 마이클의 공허한 내면을 절제된 눈빛으로 녹여냈다.

마이클이 다시 생기를 찾은 순간은 두 번이었다. 감옥에 있는 한나에게 보내줄 테이프를 녹음하기 위해 책을 읽을 때, 그리고 석방될 한나가 살 집을 꾸밀 때. 가구를 배치하고 그림을 벽에 걸면서 마이클의 얼굴은 상기됐다. 한 남자의 한 인생을 온전히 사로잡았다는 점에서, 한나는 행복한 여자였다.

한나의 삶은 자존심이 끌어간다. 그녀에게 자존심은 사랑보다 중요했다. 문맹이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승진도 마다했고, 마이클도 버렸고, 종신형도 감수한다. 한나에게 문맹은 나치의 앞잡이였다는 사실보다 더 수치스러운 약점이었다. 남의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는 한나만의 셈법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한나 삶의 주인은 한나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나가 마이클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도, 끝까지 ‘꼬마(kid)’란 호칭을 고수한 것도 그 자존심과 같은 색깔이다. 외롭고 아픈 자존심. 그 깊은 그림자를 눈치챈 관객들을 울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영화는 나치 가해자 미화라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재판정에서 한나는 매달 10명씩 가스실로 보낼 사람을 뽑았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다. “매일 사람들이 새로 들어오는데 자리는 부족하고….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한나의 순진한 질문에 모두 말문이 막힌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 그렇게 역사엔 정답이 없다. 하지만 정의가 없지는 않을 터. 그 미묘한 경계에 서서 관객은 갈등한다. 마이클도 꼭 그랬다. 그래서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렇다고 비극일까. 희·비극이 뒤섞인 삶의 속성. 그래서 여운이 더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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