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영컬처 산책]3. 디지털 대항문화, 사이버 대안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아이들은 컴퓨터의 접속 바깥에 놓이면 불안하다. 누군가 인터넷으로 나를 찾고 있을 것 같은 착각 때문이다. 중심이 없고 주도자도 없고,간혹은 무정부주의를 닮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이 그리는 신세계는? 오늘도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서 밤을 지새우고 지금 어디선가 졸면서 열린 세상을 꿈꾸고 있을 게다.

맥루한은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책에서 ‘불안의 시대는 대부분 어제의 도구,과거의 개념으로 현재의 일을 하려들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구세대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현실세계에서 과거의 개념으로 현재의 일을 처리하려 한다.

구세대와 신세대는 새로운 도구와 새로운 개념을 갖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난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인 오늘의 현실에서는 단순한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도구와 개념의 새로움이 신세대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된다.

존 페리 발로가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에서 던진 다음과 같은 경구는 구세대와 현실세계에 대한 신세대와 사이버스페이스의 경고이 도전이었다. “너희 자녀들이 아주 친근한 그 세계에서 너희는 항상 이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네 아이들을 두려워하고 있구나. 너희가 그들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부모의 책임이라는 미명 아래 관료제를 신임하지만 너희는 너무 어리석어 너희 자신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구세대가 어제의 도구와 과거의 개념에 연연해 하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새로운 도구와 개념으로 무장한 신세대는 행복한 삶의 실현을 위해 거듭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젊은이들이 네트의 주된 사용자라는 사실은 일단 긍정적인 의미를 던져준다. 젊은이는 이미 변화된 환경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과거의 개념이나 도구로 현실을 재단하려 들지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컴퓨터 문화가 과연 새로운 도구와 개념을 만들어내는 새로움의 문화인가에 대해서는 주저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다. 컴퓨터로 사주를 보거나 컴퓨터를 타자기 대용으로 쓰는 데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해서는 디지털 문화의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없다. 새로운 매체로 구식의 전통적인 일거리를 처리하고 있다면 이것은 정작 디지털 문화의 퇴행을 자초하는 격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매체를 만나야 새로운 문화가 꽃필 수 있다.

그런데 새로운 인간들이 사이버스페이스를 구성하지만 사이버스페이스가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기도 한다. 산업시대는 표준화하고 위계적인 질서에 잘 순응하고 경쟁에 용의주도하게 대처하는 인간형을 양산하였다. 표준화와 규격화한 생산체제는 사람의 인성까지도 표준화하였다.

그래서 몰개성과 천편일률,위계적인 권위구조에 대한 복종이 젊은이들에게 요구되는 미덕이었다. 자유롭고 개성이 흘러 넘치고 자신의 주장을 꼿꼿하게 펼치는 사람은 버릇없고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뭔가 튀는 사람으로 찍혔다. 이러한 현실세계의 구속이 창조적인 인간형의 발현을 가로막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변화하면 사람들에게 요구되거나 기대되는 덕목도 변화한다. 근면성과 합리성이라는 덕목은 지적 활용 능력과 엉뚱한 창조성에 자리를 내준다. 농업시대에 씨름대회가 성행했고 산업자본주의시대에 기능 올림픽이 열렸다면 이제 정보활용과 창조의 경시장이 펼쳐질지도 모를 일 아닌가.

정보화 시대에는 과연 어떤 인간형이 필요할까. 첫째,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보 활용이 새로운 지식 생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둘째,이런 기초 능력과 더불어 남과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공론을 엮어갈 수 있는 협동의 능력이 요구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을 엮어나갈 의사소통 능력이 필요하다. 혼자 떨어져 있으면서도 남과 협력하며 원활하게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혼자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보다 큰 성과를 올릴 것이다. 이와 더불어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정보와 지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러한 능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결국 네트 활용의 핵심은 교육 문제로 귀착된다. 지난 30년간 주입식 교육이라는 틀에 대해 매년 똑같은 문제가 지적되었지만 우리의 교육체제는 아직까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물고기를 주는 것으로는 기아(饑餓)문제를 해결할 수 없듯이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는 정보를 주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보를 사용하여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정보생산자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비트(bit)시대’의 교육이다.

아이들의 두뇌를 기형으로 만드는 기성세대는 현대사회에서 예술과 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니까 이것까지 주입식으로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무지한 주입식 교육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이 새로운 비트 시대에 창조성을 꽃피우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21세기의 뛰어난 창조적 정신은 상상력에서 나온다. 멀티미디어와 네트워크의 발전은 우리의 상상을 현실로 바꾸고 있다. 디지털 시대는 이미 우리의 코앞에 다가와 있다. 오늘의 신세대는 인터넷이나 멀티미디어의 혜택을 받기만 하는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멀티미디어 세계를 앞당기고 창조해 나가는 적극적인 창조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백욱인 <서울산업대 교수>

<약력>

·57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연구위원 역임(94∼96년)

·현재 서울산업대

인문자연학과 교수(사회학)

·역서 '디지털이다'(95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