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사기극…주범 변씨 "이철희·장영자사건 뺨친 수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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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구속기소된 卞인호씨는 무일푼으로 출발,치밀하고 기발한 수법으로 대기업과 은행.주식시장을 휘저으며 4천억원대의 자금을 주무른 희대의 사기범이었다.

그는 자금난에 시달리는 기업체들에 어음을 할인해 주겠다고 접근, 거금을 챙겨 떼먹는 고전적 수법에서부터 기관투자가들과 결탁한 주가조작으로 시세차익을 얻는 지능적 수법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사기수법을 총동원했다.

이 때문에 "卞씨의 공소장은 사기범들의 교과서와 같다" 며 수사검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또 80년대 장영자. 이철희 부부를 비롯, 역대의 거물사기범들이 막강한 자금동원력과 권력층과의 인맥관계를 배경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卞씨는 오직 능란한 언변과 과감하면서도 용의주도한 수완으로 금융관행의 허점을 파고들었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지난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사기행각에 나선 卞씨의 첫 '사냥감' 은 시중은행들. 그는 ㈜델콤반도체등 유령업체를 차린 뒤 허위신용장을 개설, 8개 은행으로부터 2천3백억여원의 '네고대금' 을 받아냈다.

또 수출입을 대행해주는 업체들로부터도 물품대금 명목으로 4백25억원을 받아 챙겼다.

서류상으로는 16메가D램등 고가의 부품을 거래하는 것으로 해놓았지만 실제로는 폐기된 반도체.공 테이프등 폐품을 수출했다가 포장도 뜯지 않고 다시 수입하는 방법을 썼다.

반도체.컴퓨터 주변기기등이 수출장려 정책에 따라 검사제외 대상 품목으로 지정된 점을 이용한 수법이었다.

결국 '쓰레기더미' 가 태평양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卞씨 형제들의 사기액수가 계속 늘어간 셈이다.

그는 또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행세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융통어음을 할인해 주겠다며 모두 6백28억원을 받아 가로챘다.

S.K.H등 대기업 계열사들과 중견기업들이 卞씨의 속임수에 걸려들었다.

사기행각은 주식시장으로 이어졌고 은행의 자금관리담당자.증권사 직원들과 짜고 자신이 보유중인 종목에 대해 차명계좌로 고가매수 주문을 반복, 주가를 끌어올리는 '작전' 을 주도했다.

또 "일본 유명회사가 인수하려 한다" 는 헛소문을 퍼뜨린 뒤 이를 부인하는 공시를 내는 수법으로 ㈜중원의 주가를 마음대로 주무른 뒤 경영지배권을 확보했다.

자신감을 얻게 된 卞씨는 지난 6월 상장기업인 ㈜레이디가구의 공개매수를 추진했다.

기업체들로부터 매수자금을 얻고 소액투자자 9백여명으로부터 주당 8만원씩에 청약받기도 했지만 자본이 달려 이 '작전' 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공개매수를 선언하면 레이디가구 대주주들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여 시세차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卞씨는 마지막 수단으로 모 종금사 인수계약까지 했지만 '자기자본 한푼 없는 빈털터리 사기꾼' 이란 정체가 이미 드러난 시점이어서 이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卞씨는 한꺼번에 밀려드는 빚 독촉을 피해 도피했다가 이달초 검찰에 검거됐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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