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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경제위기와 ‘하나의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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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유럽 지도자들은 세계 경제위기를 맞아 각자 자기 나라의 생존 방안을 찾는 데만 몰두한 듯하다. 특히 ‘구(舊)유럽’ 지도자들은 ‘신(新)유럽’ 국가를 위해 금고를 열길 주저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지속되면 유럽을 하나로 묶는 프로젝트가 마비되는 중대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이는 유럽 경제의 회복을 지연시킬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참담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유럽연합(EU)에 새로 가입한 동유럽 및 중부 유럽 국가들은 구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제위기로 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지난달 초 유럽 지도자들이 이들 국가에 대한 특별 지원 프로그램을 거절하자 실망감이 고조되고 있다. 물론 각국의 상황에 따라 다른 해법을 써야 한다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메르켈을 비롯한 유럽의 지도자들은 새 회원국들을 돕겠다는 의사를 보다 분명하게 밝혔어야 했다.

신유럽 국가들이 5년 전 EU에 참여하자 기대감이 한껏 높아졌었다. 지난해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EU의 확대는 구유럽에 수지맞는 장사인 듯 보였다. 새 회원국들의 높은 경제성장률은 구유럽의 가라앉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자 각국의 성장률이 줄줄이 급락했다. 신유럽 국가들의 수도마다 대규모 군중 시위가 발생했고 몇몇 정부가 무너졌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더 큰 유럽을 향한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와 믿음도 흔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도록 방치한다면 국수주의와 외국인 혐오라는 과거의 망령이 기세를 떨치게 될 것이다. 새 회원국 중 몇몇은 신생국인 데다 기반이 취약하다. 그들이 자유 민주주의 유럽의 품으로 귀환하며 품었던 낙관주의는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그래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안정된 유럽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은 유권자들에게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을 돕는 게 이익이 된다는 걸 설명해야 한다.

EU 확대가 가져온 결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장기적 숙제가 될 것이다. EU 확대에 대한 동의가 이뤄졌던 무렵 10개 신규 회원국의 경제 규모를 다 합쳐도 대략 네덜란드 수준이었다. 지난 5년간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한 결과 이들 국가의 국민총생산(GNP) 총합은 베네룩스 3국의 GNP보다 약간 적은 수준이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경제를 살리는 것 자체는 중차대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의 유럽’이란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데 대한 정치적 파장은 심각할 것이다.

유고슬라비아가 존재하던 1991년 유럽각료이사회 의장이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이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유럽의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말뿐인 약속을 했을 때 그 의장은 “지금은 미국의 시대가 아닌 유럽의 시대”라고 말했다. 민망한 일이지만 당시 발칸의 유혈 사태를 종식한 중재안을 이끌어 낸 건 미국이었다.

이번엔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걸 기대할 수 없다. 유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등 다른 기구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김새는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반드시 ‘유럽의 시대’여야 한다.

우페 엘레만 젠슨 전 덴마크 외무장관
정리=하현옥 기자 ⓒ Project Syndi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