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의사양성]下.바람직한 '의사 키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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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년전 외국에서 의사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모국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는 S병원의 김모박사. 세계 굴지의 암센터에서 20여년간 암전문의로 활약했으며 내과전문의등 3개분야에서 미국 전문의 정회원 자격을 지녀 국내 소화기암분야 최고의 명의로 손꼽힌다.

그러나 김박사는 올해초 치른 국내 내과 전문의 시험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외국에서 이름을 떨치다 귀국한 J병원 H교수나 S병원 L교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처럼 의료계의 대가들이 대거 탈락한 이유는 '족보' 라 불리는 예상문제집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족보를 보지 않으면 떨어진다' 는 것은 본과초년병의 해부학 시험에서 전문의 시험까지 의학도에게 두루 통용되는 불문율. 그러니 강의나 교과서 공부보다 족보 구하기에 급급하다.

좋은 족보를 구하는 것이 합격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족보의 출처는 전국의 유명대학병원 교수. 가급적 자기 병원의 전공의들을 합격시키기 위해 자의반타의반 문제를 유출하기도 하며 실력평가보다 떨어뜨리기 위주로 희귀케이스나 정답이 모호한 문제도 출제한다.

심지어 시험대상자인 전공의가 문제를 만들어 내고 교수가 여기에 사인만 하는 경우마저 있다는 것. 금전을 통한 족보거래도 이뤄진다.

지난해 시험을 치른 내과전문의 L씨 (32) 는 "출제위원이 없는 중소병원 전공의들의 경우 유명 대학병원에서 한 질당 50만원에서 3백만원이란 돈을 주고 사기도 한다" 고 고백했다.

의학교육의 입시학원화 현상은 의대 본과 4학년들의 의사국가시험 준비에서 잘 나타난다.

강의와 실습등 정규수업은 뒷전이고 대학마다 합격률을 올리기 위해 특강과 보충수업을 실시한다.

여기엔 명문대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느긋하게 학생들의 자율학습에만 맡겨왔던 서울대도 95년부터 1주일에 2시간씩 국시준비강의를 시행하고 있다.

고려대도 다음달 23일로 예정된 국시를 위해 1년으로 짜인 실습및 강의 일정을 8월말까지 앞당겨 끝내는 '배려' 를 보였다.

현행 의학교육이 양질의 의사보다 시험용 전문가를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파행적인 의사양성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교육목표 재조정과 함께 관계자들의 의식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허갑범 (許甲範) 전연세대의대 학장은 "기존 의대교육이 환자와 동떨어진 공허한 지식전달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고 비판했다.

'의대교육은 의학이란 학문 자체보다 환자에 대한 서비스가 우선' 이란 세계의학교육연맹의 교육지침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교육내용도 실습 위주로 전환하고 의무실습 일수를 지키도록 해야 한다.

의사국가시험이나 전문의 시험은 합격 위주의 파행교육을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족보에서 벗어난 출제로 94년 비뇨기과 전문의시험 합격률이 30%, 95년 의사국시 합격률은 64%에 그친 것은 '제살 깎기' 의 좋은 예. '인술' 에 앞서 최소한의 '기술' 조차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엉터리 자격자들의 배출만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홍혜걸.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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