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예산 2조7000억, 한국연구재단의 성공 조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8호 34면

현대 사회에서는 학문과 기술 수준이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하지만 학문과 연구개발 활동은 재정적 뒷받침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전에는 교육인적자원부 산하의 한국학술진흥재단과 과학기술부 산하의 한국과학재단이 주로 연구개발 지원을 해 왔다.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가 통합된 뒤 두 재단을 통합하는 작업이 지난 1년간 추진돼 왔다. 드디어 3월 25일 한국연구재단법이 공포돼 통합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한국연구재단은 연간 2조7000억원의 예산을 연구자들에게 지원하는 거대 기관이 될 것이다. 2012년에는 국가 연구개발 예산이 5조원에 이르러 규모 면에서 세계적인 거대 기관이 될 것이다.

정부가 기존 재단을 통합하는 배경은 연구지원 사업을 체계화하고, 연구지원 관리 창구를 단일화해 효율을 높이고자 함이다. 그러나 물리적이고 획일적인 통합만으로는 기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 다양성과 급변하는 시대에 맞는 정체성 확보가 동시에 필요하다. 통합 논의 과정에서 많은 연구자가 지적한 것이 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 확보다. 학술 및 연구개발 활동은 장기 계획에 따라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고 이뤄져야 하므로 연구재단은 정권과 관계없이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추고 운영돼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이번에 PM(Program mana- ger:연구사업 관리 전문가) 제도가 강화된 것은 환영할 일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에 의해 연구사업 관리가 가능하도록 PM 제도가 법안에 포함됐다. 민간 전문가의 참여 확대로 전문성이 확보돼 창의적 과제 발굴과 미래지향적 연구개발 방향 설정 등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런 개선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부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첫째, 연구재단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권위 있는 이사장 체제 구축이다. 독립성은 힘에서 나온다. 권위 있는 이사장 체제를 통해 예산 확보와 자율 운영 등의 독립성이 확보돼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연구재단 이사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연구재단의 기획 기능 강화가 필요하다. 선진국에선 연구지원 기관이 각 분야의 전문가 집단에 충분한 시간과 자금을 제공하면서 학문 분야별 장기 발전 계획 수립을 요청한다. 이렇게 도출된 장기 계획에 따라 국가 연구개발사업 지원이 이뤄짐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각종 학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 집단에 장기 발전 계획 수립을 요구하기보다는 정부가 직접 위원회를 구성해 계획을 세우고 있다. 특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 연구개발사업 계획을 짧은 기간에 급히 만드는 현실을 보게 된다. 정권에 따라 다소 변화를 추구할 수 있겠지만 연구개발의 발전은 정권과 관계없이 도도히 흐르는 큰 물줄기와 같이 이뤄져야 한다. 과거 일부 소수 인사에 의해 연구개발이 주도될 때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연구재단의 출범을 전문가 집단에 의한 연구개발 기획 체계 수립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셋째, 계획 중인 PM의 수가 인문사회와 과학기술 분야를 합해 2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적은 수의 PM으로는 전문성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결국 PM이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분야의 연구 관리를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므로 PM의 수를 늘려야 한다.

넷째, 연구재단의 인력 확보 문제다. 통합되는 재단들의 인력이 약 300명 수준인데 한국연구재단이 관리해야 하는 예산이 2조7000억원이므로 직원 1인당 관리사업비가 대략 90억원이다. 미국 국가과학재단(NSF)의 경우 40억원, 독일연구재단(DFG)의 경우 30억원이므로 선진국에 비해 2~3배나 되는 형편이다. 관리의 질적 수준 저하가 우려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수요자인 연구자들에게 불편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정한 규모의 인력 확보가 필요하다.

다섯째, 국가 연구개발의 초점은 기초연구에 둬야 한다. 개발에 대한 투자는 산업체가 하고, 국가는 기초연구에 투자하는 것이 선진국형 체제인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개발에 대한 투자가 기초연구보다 강조되고 있다. 기초연구 중에서도 자연과학에 대한 투자가 강화돼야 한다.

NSF가 관리하는 예산이 5조5000억원, DFG가 관리하는 예산이 1조6000억원 정도이므로, 앞으로 출범할 한국연구재단은 세계적 규모다. 교육과학기술부는 6월 말을 목표로 재단 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규모에 맞게 명실상부 세계적인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이런 점들을 보완해 선진국형 체제를 갖춰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