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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수 컬럼] 북한 미사일 해법 漢 武帝에게 배워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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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35면

북한이 한 달째 벌이는 ‘미사일 게임’을 보면서 한(漢) 무제(武帝:BC 156~BC 87)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에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 4군을 설치한 침략자이나 중국사에선 최대 골칫거리였던 흉노족을 궤멸시켜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53년간 재위하면서 중화제국(中華帝國)의 기초를 닦은 4대 명군(名君)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흉노는 강대한 북방 국가였다. 수십만의 기마병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한 왕조의 성(城)과 군사·백성을 농락했다. 한 고조(유방)는 어설픈 반격에 나서다 백등산(白登山:산시성 다퉁시)에서 40만 흉노군에 포위돼 굴욕적인 형제 관계의 화친을 맺어야 했다. 이후 한 왕실은 금은보화와 비단·특산품·여인 등 막대한 공물을 보내 흉노를 달랬다. 수성밖에 모르던 한족(漢族)에게 질풍노도처럼 달리는 흉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21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한·흉노 관계는 남북한에 시사점을 던져 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0년대 이후 핵과 미사일에 집착했다. 경제가 파탄 난 나라에 걸맞지 않게 119만 명의 병력과 엄청난 재래식 무기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2년 전 남북 장관급회담 때 권호웅 북측 수석대표는 “남측도 선군정치 덕을 보고 있다”는 말로 우리 사회를 들끓게 했다. 남측이 그 대가로 돈과 쌀과 비료를 주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는 투였다.

김정일 북한 체제는 요즘 남측을 ‘봉’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수조원의 경제 지원을 받고도 급기야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게 주권 국가의 당연한 권리’라는 논리를 펼친다. 이번에 미사일 게임이 통하지 않으면 제2차 핵실험 카드를 꺼낼 가능성도 제기된다. 답답한 것은 우리 정부의 대응책이다. 북측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강행해도 채찍보다 당근으로 달래야 하는 자기모순의 함정에 빠져 있다. 한 왕실이 흉노에 재물을 주고 평화를 구걸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한 왕조가 흉노족을 깨뜨린 것은 16세에 즉위한 무제 덕택이었다. 그는 수성 전략을 버리고 적을 찾아 공격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위청·곽거병 같은 젊고 유능한 장수들을 키우고 기동전 위주로 병력·병마·병기를 갖춰 나갔다. 그런 다음 흉노의 근거지를 무자비하게 정벌했다. 외교적으로는 장건을 서역에 파견해 원교근공(遠交近攻) 차원의 군사동맹을 모색했다. 실크로드가 그때 열렸다. 만약 한 무제가 ‘현상 유지’에 만족했다면 동아시아의 역사와 세력 판도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협상학에는 바트나(BATNA:Best Alter- 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라는 용어가 있다. 전문가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를 압박할 카드를 갖고 있어야 이를 바탕으로 최선의 협상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94년 빌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 핵시설 폭격을 논의했는데 협상학 관점에서 보면 북측에 핵 개발의 대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경고하는 압박 카드일 수 있다.

한 무제가 우리 사회에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핵·미사일 장단’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김정일 체제의 위협에 맞설 다양한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유엔 안보리 제재 강화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만으로는 부족하다. 북측의 핵심 계층을 직접 겨냥하는 압박 카드를 보여야 한다. 한·미·일 공조 체제도 중요하지만 북한 뒤편의 중국·러시아를 지렛대로 활용하는 외교 전략을 펼쳐야 한다. 남북이 서로 두려워할 때 역설적으로 남북 대화는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한 무제가 가르쳐 주는 ‘북한 다루기’의 지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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