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하듯 공부하고 범인 잡듯 모아”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 관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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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11면

진짜 국보를 발굴하고, 가짜 국보도 잡아낸 사람이 우리나라에 딱 한 사람 있다. ‘마약 검사’로 이름을 날린 유창종(64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다. 서울지검장, 대검 마약부 부장을 거친 이력엔 송곳 하나 꽂을 틈 없이 야무지고 단단해 보이건만, 그는 손꼽히는 문화재 애호가다. 평생 모은 기와만 4500여 점에 달한다. 지난해 서울 부암동에 문을 연 기와 전문 박물관 ‘유금와당박물관’에서 1일 그를 만났다.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수사하듯 와당(무늬 있는 막새 기와)을 공부했어요. 수집도 범인 잡듯 했고요.”
충주지청에서 근무하던 1978년 중원탑평리칠층석탑(국보 제6호) 터에서 ‘육엽연화문’ 파편을 주웠다. 삼국의 기와가 각각 다른데, 육엽연화문은 세 나라의 특색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 까닭을 밝히느라 시작된 수집은 와당에서 한ㆍ중ㆍ일 문화 교류의 흔적을 찾는 것으로 발전했다. 1979년 고미술 연구 모임 예성문화연구회 회원들과 답사를 다니다 빨랫돌로 쓰이던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를 발견하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결같이 제작됐으니 미술사 자료로도 좋고, 70년대 말만 해도 기와는 공짜로도 주던 시절이라 검사 월급으로 수집하기도 좋았죠.”
94년엔 가짜 국보를 밝혀냈다. 거북선에서 사용된 대포 ‘귀함별황자총통’을 해군이 바다에서 건져냈다며 떠들썩하게 국보로 지정한 사건이었다. 가짜란 소문이 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잘 알고 지내던 골동품상에게 발굴 과정에 개입한 해군 대령 황모씨와 골동품상 신모씨의 이름을 대 보았다.

1 고구려 귀면기와. 한국 기와 중 가장 강인한 인상에서 고구려인의 기상이 드러난다

“신씨 전공이 일본 칼에 옛 시구를 새겨 부식시킨 뒤 10~20배 비싼 값에 팔아먹는 거랍디다.”
신씨의 주물공장에서 증거품 한 트럭을 압수했다. 전문가조차 가려내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위품들이었다. “그걸 가지고 학자들이 국제 학술회의도 여러 차례 했더군요.” 가짜를 가려낼 재간이 부족한 학자들의 한계를 그때 알았다. 와당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학설론 납득이 안 되는 게 많아요. 학자들은 우리나라가 4세기 들어 기와를 만들었으리라 추측하지만, 한나라 이후 중국에선 사라진 기와 형태가 고구려에 나타납니다. 즉, 한의 영향을 받아 훨씬 일찍 기와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초임 검사 시절부터 25년간 모은 기와 1873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그걸로 박물관은 2002년 ‘유창종실’을 만들었다. 일본의 와당 수집가 이우치 이토미가 87년 자신의 컬렉션 절반을 기증해 만든 ‘이우치실’ 옆방이다. 이우치실을 보며 “‘일본인 보고 나쁜 놈이라더니 우린 조상 유물도 간수 안 하고 뭐했어’라고 자식 세대가 물으면 뭐라고 할까”란 생각 끝에 한 장도 남김 없이 내놨던 게다. 그러다 2003년 변호사가 되자 다시 수집벽에 발동이 걸렸다.

“월급을 훨씬 많이 주더라고요. 아내와 상의해 예전엔 돈이 없어 못 샀던 걸 사들이기 시작했죠.”
부창부수라고 홍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인 아내 금기숙(57)씨 역시 못 말리는 수집광이다. 그와 아내의 성을 따 ‘유금’이라 이름 지은 박물관엔 아내의 중국 도용(흙으로 빚은 인형) 컬렉션 1300여 점도 있다. 한 점 한 점 사 모으던 검사 시절과 달리 컬렉션을 통으로 구입했다.

그중 결정적인 게 이우치 컬렉션이었다. 이우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와당 전부를 유물에 관심 없는 자식들 대신 유 변호사에게 넘겨준 것이다. 유 변호사가 가장 아끼는 고구려 귀면기와도 그렇게 손에 넣었다. 와당 사느라 빚까지 얻자 선배 변호사가 “노후를 생각하라”며 혼내기도 했다.

“젊어선 부부가 손잡고 돌아다니며 수집하길 즐겼으니, 나이 들어선 박물관에서 토론하고 연구하며 소일하다 가려고 합니다.”


중앙일보 10년차 기자다. 그중 5년은 문화부에서 가요·방송·문학 등을 맡아 종횡무진 달렸다.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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