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즐겨읽기] 낯선 남자가 말했다, “당신 아내는 명랑했다”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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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이레 344쪽, 1만1000원

아내가 죽었다. 가슴을 도려내야 할까봐, 왼쪽 젖가슴에 종양을 발견하고도 병원에 발걸음을 끊은 탓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은 게 언제였더라…. 얼마 뒤 아내 앞으로 날아든 낯선 남자의 편지. 아내에겐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명랑한 여자였다고?”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 보다, 그 남자 앞에서 완전히 다른 여자가 되었다는 게 그에겐 더 큰 충격이었다. 질투에 사로잡힌 그는 아내의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선다.

영화로 만들어진 유명한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로 유명한 독일작가가 쓴 사랑에 관한 중단편 모음집이다. 표제작 ‘다른 남자’는 가장 보편적인 사랑과 질투의 정서를 세심하게 다뤘다.

그러나 그의 작품집은 단순한 사랑과 불륜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전쟁 후 독일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죄의식과 분단의 상처도 문학적으로 빚어졌다. 아버지가 금쪽 같이 아끼던, 그러나 나치 시절의 비밀스런 사연이 담긴 그림과 사랑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를 쓴 중편 ‘소녀와 도마뱀’, 비밀 경찰에 정보를 팔아 넘긴 남편에 대한 배신감에 남편의 친구를 유혹한 아내 이야기 ‘외도’ 등이 그렇다.

독일의 역사적 특수성이 담기긴 했지만 ‘감정의 고고학자’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작가답게 미묘한 감정의 변곡점을 예리하게 잡아낸다. 특히 아내와 남편, 아버지와 아들 등 가까우면서도 어느 순간 타인같이 느껴지는 가족 구성원 간의 거리를 짚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각각의 이야기는 얼마간 메마르고 건조한 듯 이어지다가도 결국엔 따뜻한 온기에 감싸인다. 안도감을 준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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