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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10주기…수집명품전·추모음악회·학술 세미나등 행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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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964년 어느날 애버리 브런디지 (1887~1975) 올림픽위원장이 급히 한국에 날아왔다.

그는 국제스포츠계의 거물이면서 한국 도자기 매니어이기도 했다.

한국에 달려온 것은 고려청자 한 점 때문. 문제의 도자기는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靑磁辰砂蓮花文瓢形注子) .삼성그룹 창업자이며 중앙일보 창립자인 호암 (湖巖) 이병철 (李秉喆.1910~1987) 회장이 생전에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 가운데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했던 도자기였다.

청자의 푸른 바탕 위에 붉은 무늬을 넣을 수 있는 진사 (辰砂) 는 고려시대에는 금보다 귀했다.

이런 진사를 아낌없이 듬뿍 사용해 멋을 낸 것이 바로 이 도자기다.

소담스런 연꽃봉우리 모양의 형태에 몸통 중간에는 동자상으로 치장했다.

그리고 손잡이의 엄지손가락이 닿는 곳에는 청개구리 한마리를 살짝 앉혀 손이 미끄러지는 것을 막았다.

형태와 문양.치장등 어느 한군데 험잡을 데가 없는 명품중의 명품이다.

브런디지가 급히 달려온 것은 이 청자가 매물로 나왔다는, 잘못 알려진 소문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그는 李회장의 호의로 이 명품을 한번 배관 (拜觀) 하고 돌아가는데 그쳐야 했다.

장차 미술관 설립을 염두에 둔 李회장이 미술관을 대표하는 얼굴로서 이 청자를 꼽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의 달인이었던 호암은 경영 기반이 잡히면서 문화보국 (文化補國) 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했고 75년에는 국보.보물 50여점이 포함된 수집미술품 2천여점을 재단에 쾌척했다.

82년 4월 용인에 호암미술관이 개관하면서 다른 중요한 미술품들과 함께 이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전자도 일반에 비로소 공개되기 시작했다.

오는 19일로 호암 10주기. 이를 맞아 유족과 삼성문화재단에서는 호암의 문화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수집명품전과 음악회.학술세미나등을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준비했다.

첫번째 행사로 지난 15일 호암미술관은 '호암 이병철선생 10주기추모 수집명품전' 을 개막했다.

이 전시는 호암이 생전에 수집한 고미술과 현대미술품 가운데 명품만을 엄선한 전시. 호암의 미술품 수집은 30대 중반 서예에서부터 시작돼 회화.신라토기.조선백자 그리고 고려청자를 거쳐 금속유물로 옮겨갔다.

그리고 열악한 국내 화단을 위한 후원으로서 현대미술도 컬렉션했다.

이번 전시에는 브런디지를 낙담케 한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전자 (국보133호) 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의 '죽노지실 (竹爐之室)' 현판.배모양의 신라토기 (보물555호).청화백자 죽문각병 (竹文角甁.국보258호) 등 고미술품 22점이 전시중이다.

현대미술쪽에는 박수근의 '소와 아이들' , 김환기의 '영원의 노래' , 르노아르의 '나부' 등 10점이 전시되고 있다.

또 문화재를 애호했던 고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직접 휘호한 서예작품 2점 그리고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흉상과 초상화도 나란히 일반에 선보였다.

내년 2월15일까지 계속된다.

전시행사와 함께 18일 오후 2시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실에서는 한국경영사학회 (회장 고승희)가 '호암사상의 재조명' 이란 주제로 호암의 경영철학을 경영학적 측면에서 고찰하는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는 조기준 학술원회원이 '기업발전과 전문경영인체제' 란 주제발표를 하며 '한국의 경제발전과 호암' 이란 제목으로 종합토론회도 열릴 예정이다.

또 이날 저녁에는 도의문화 창달에 기여한 제22회 효행상 (孝行賞) 시상식이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생전에 음악을 애호했던 고인의 뜻을 받들어 삼성문화재단에서는 20일 오후6시 호암아트홀에서 대규모 추모음악회를 개최한다.

이번 공연은 금난새씨가 지휘하는 수원시향 연주와 호암가족사 (社) (삼성.한솔.제일제당.새한.신세계그룹) 연합합창단의 합창 그리고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의 연주로 꾸며질 예정.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마림바 정지혜) , 마르티니의 '트럼펫 협주곡 D장조' (트럼펫 안희찬)가 수원시향의 연주로 펼쳐지며 이어 소프라노 박정원 (한양대 교수) 씨가 들리브의 '카디스의 처녀들' , 테너 신동호 (중앙대교수) 씨가 페릴리의 '위대한 사랑' 을 부르고 2중창으로 카푸아의 '오 나의 태양' 을 부른다.

또 생전에 국악 진흥의 초석을 마련하는등 국악을 무척 애호했던 호암의 유지를 기리면서 이준호 작곡의 창작 국악곡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 (해금 정수년) 이 연주된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호암가족사 직원 50명으로 구성된 연합합창단이 부르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 '가라 슬픔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 ,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 허커의 '에레스 투' 등. 호암가족사 연합합창단의 공연은 아름다운 화음을 빚어내는 합창의 정신을 살려 가족사간의 우의와 화합을 다짐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 각 그룹에서 10명씩 파견해 구성된 이 합창단은 공연 한달전부터 매주 토요일 모여 연습해왔다.

이같은 행사와 함께 기일 (忌日) 인 19일 오전 10시에는 호암아트홀에서 추모식이 열리며 유족과 삼성문화재단.기업관계자등의 묘소참배가 있을 예정이다.

윤철규·김창호·이장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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