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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창훈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② 담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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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는 한 자 정도 되고 폭은 그 반쯤 된다. 날카로운 부분 아래로 더부룩한 털이 있으며 껍질의 빛깔은 새까맣고 안쪽은 미끄러우며 검푸르다. 말린 것이 사람에게 가장 좋다. 콧수염 뽑을 때 피가 나는 사람에게 그 털을 태워 바르면 지혈 효과가 매우 좋다. 본초강목에 의하면 각채(殼寀) 여음(女陰) 동해부인(東海夫人)이라고 했다. (부분 생략)

담채는 홍합이다. 흔히 담치라고 한다. 남쪽 가까운 바다에 흰 스티로폼이 밭이랑처럼 늘어서 있으면 거의 홍합이나 굴 양식장이다. 나는 1980년대 중반부터 몇 년간 홍합 일을 했다. 작업선이 양식장에서 따오면 바닷가 현장에서 씻고 삶고 까고 한 다음 공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게 기본 구조이다. 현장에서는 중년 여인네들이 삶은 홍합을 깠다. 사내들은 떡 진 머리에 슬리퍼 끌고 오전 참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막걸리가 늘 준비되어 있어 한잔 따라주면 별생각 없는데 굳이 주겠다니 받는다는 투로 마시고는 막 삶은 홍합을 들고 까먹는데 어느 누구라도 그냥 먹는 이가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똑같이 생겼을까, 간밤에 보던 것과 단순 비교하는 측, 이 예쁜 것을 왜 이렇게 모지락스럽게 삶아버린다냐 아이고 불쌍한 거, 하는 측은지심 형, 뭐 한다고 쫙 벌리고 있을까 제기, 터럭도 더럽게도 많네, 하는 세심 관찰형, 대략 이렇게 세 부류였다. 그 인정 물태를 배경으로 98년 장편 『홍합』을 쓰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홍합은 바다에서 요물로 통한다. 생긴 것 때문에 생긴 말이려니 싶지만 그게 아니다. 몸통 크기와 알 크기가 빗나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껍질은 큰데 삶아놓으면 알이 조그마할 때가 왕왕 있다. 보통 샛바람(동풍)이 불고 나면 살이 쪼그라들며 엉덩이 부분에 까만 똥이 찬다. 하늬바람(북서풍)이 불면 다시 살이 찬다.

포장마차 따끈한 홍합 국물에 소주 한잔은 추운 겨울 강력한 유혹이다. 그런데 이건 양식한 것이다. 자산어보에 나오는 담채와는 종자가 다르다. 진주담치, 지중해 담치라고 하는데 개화기 때 화물선에 붙어 들어와 퍼진 것으로 추측된다. 담채는 자연산 홍합이다. 또 하나의 토종이 갯바위에 빽빽하게 달라붙어 있는 굵은줄격판담치다. 우리 마을에서는 샛담치라 부른다. 모두 한여름에는 독소가 생겨 피해야 한다.

자연산 홍합은 매우 굵다. 횟집에서 왕왕 볼 수 있다. 그러니 한 자 정도 된다고 했을 것이다. 『자산어보』에 나오는 이런저런 해물은 요즘 것보다 좀 크게 나온다. 당시의 것이 더 컸을 터이지만 현재 쓰는 도량형이 없었기에 대략 한 자, 두 자 이렇게 붙였을 것으로도 보인다. 자연산은 모두 해녀들이 잠수질하여 빗창으로 따오는 것이다. 빗창은 끝이 반듯한 창이다.

해녀들에게 사면 싸다. 보통 1㎏에 몇 천원이다. 보통 크기로 열 몇 개 된다. 개수 작으면 그만큼 살이 꽉 찼다는 소리다. 혹시 섬에 가게 되면 요즘 홍합을 따는지 물어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해녀 집을 찾아간다. 가격 물어보고 주문을 한다. 해녀가 말할 것이다. 오늘 다섯 시쯤 가지러 와라, 또는 내일 세 시쯤 와라. 그날 간조 시간에 맞춰 물질을 하기 때문이다. 민박집이면 주인에게 주문을 부탁해도 된다.

가장 간편한 방법이 삶는 것이다. 껍질에는 이런저런 잡물이 많이 달라붙어 있다. 식칼 뒷등으로 탁탁 쳐서 긁어내듯이 떼어낸다. 칼이 없으면 날카로운 부분으로 다른 홍합을 손질한다. 그 다음 씻는다. 바닷물에 씻어도 된다.

냄비(코펠 큰 것이 되겠지만)에 넣는다. 물은 맥주잔 반 정도만 붓는다. 국물을 굳이 먹겠다면 더 깨끗하게 손질하고 물을 조금 더 넣으면 된다. 시장에서 산 양식 홍합은 세척한 것이니까 대강 씻고 바로 끓인다. 거품 넘치는 것 조심할 것.

너무 오래 끓이지 않는다. 입이 벌어지고 알이 동그랗게 보이면 먹는다. 특히 칼이나 껍질로 관자(껍질과 살이 서로 연결되어있는 꼭지)까지 도려내어 먹는다. 씹는 맛이 좋다. 운 좋으면 진주도 나온다.

홍합전 또한 별미이다. 시장에 가면 까놓은 홍합살이 있다. 씻고 물을 빼놓는다. 밀가루 입힌 다음 계란 옷 입힌다. 그 위에 튀김가루나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다. 튀긴다기보다는 지져낸다. 굴전 하는 것과 같다. 단, 굴전은 조금 덜 익혀도 되지만 홍합전은 다 익혀야 한다. 홍합은 날로 먹으면 입이 아리다. 어차피 요리는 배합과 타이밍. 몇 번 하다 보면 타이밍을 맞출 수 있다. 뜨거울 때 먹는 게 좋다. 잘 되었다면, 어느 전보다도 맛이 뛰어나다. 말린 홍합으로는 맛이 떨어진다.

자연산은 잘라서 된장국이나 죽을 쑤어 먹어도 좋다. 불 끄기 일 분 전에 양파를 조각내어 넣으면 씹는 맛이 좋다. 식성에 따라 방앗잎을 넣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 더. 붉은 게 암컷이고 흰 것이 수컷이다. 암컷이 더 맛있다.

소설가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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