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영화 '표절망령' 왜 따라다니나…창작환경 조성 시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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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영화계의 표절 논란이 급기야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태를 가져왔다.

'접속' 을 기획.제작한 명필름이 최근 일본영화 '하루' (96년) 표절의혹을 제기한 잡지사와 필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명필름측은 "한국영화들이 암암리에 일본영화를 모방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자세를 유포하고 있어 다른 제작자들도 정신적인 피해를 볼 수있기 때문에 법적인 대응을 하기로 했다" 고 밝혔다.

'접속'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에 습관적으로 따라다니는 표절시비를 한번 진지하게 점검해볼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그동안 표절혐의를 받아온 감독.제작자들은 "한국영화는 의심부터 하고 보는 문화사대주의적인 시각이 창작의욕을 꺾는다" 고 불만을 토로해왔지만 표절논란을 바라보는 영화평론가들의 입장은 다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오마쥬, 인용, 패러디는 어디에서 따온 것인가를 밝히고 창작자가 원형 텍스트를 새로운 방법으로 재창조해낸 것이지만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소재 혹은 모티브만을 따온 경우도 표절에 해당한다고 본다.

최근 우리 영화계의 큰 문제는 부분표절로 속일 수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왕자웨이 영화의 분위기를 빌려온 '홀리데이 인 서울' 이나 뒤늦게 원작자와 판권계약을 체결한 '체인지' 도 관객들을 속였다는 점에서 표절작품이다" 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김정룡씨는 "우리 영화계의 표절논란은 기획자들의 상상력의 빈곤과 관계가 깊다.

그동안 대놓고 모방한 것들도 많았고, '투캅스' 의 경우 오락적인 작품성을 지녔고, 한국적인 번안이기 때문에 표절이 아니라는 등 일부에서는 표절을 정당화하는 경우조차 있다.

우리 식의 미학적인 정체성을 도외시한 채 감각적으로 영상을 베끼거나 에피소드, 모티브를 따오는 경우가 실제로 많지 않은가" 라고 반문했다.

TV프로와 광고는 물론 문학에서도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를 모방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처럼 한국영화도 표절혐의에서 벗어날 수없다는 것이다.

사실 표절을 법정에서 가리는 문제는 무의미하다.

'상호 텍스트성' 이란 개념 아래 작품들끼리 영향을 주고 받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결국 표절은 인용이나 원작을 사전에 밝히느냐 아니냐는 창작자의 도덕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작품에서 따오면서 밝히지 않는다면 명백한 표절에 해당하는 행위다.

한국영화의 표절논란이 거의 일본영화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 제작자나 기획자 측은 표절시비가 일 때 대부분 "우연의 일치로 소재가 같다" 거나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기획되는 한국영화들을 보면 일본에서 흥행이 됐거나 화제를 모은 영화들과 비슷한 소재들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학생부군신위' 는 이타미 주조의 '장례식' 과 비슷하다는 혐의를 받았고 최근 일본에서 '러브레터' 라는 영화가 히트하자 편지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3~4편 기획되기도 했다.

22일 개봉예정인 이정국 감독의 '편지' 도 벌써 이 작품을 모방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충무로에서는 또한 올해 일본의 최대 흥행작인 '함께 춤추실까요' 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 기획되고 있으며, '실락원' 의 영향으로 유부남.유부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많이 등장할 것이란 말도 나오고 있다.

'실락원' 의 경우에는 유영필름이 리메이크 판권을 사서 제작준비에 나서는 등 최근들어서는 표절시비를 의식한 조치들을 취하는 변화가 조금씩 일고 있기는 하다.

한 제작관련자는 "감독.기획자들이 일본영화를 모방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나리오 작가들도 일본 소설을 많이 읽는 등 일본이 어떤 형식으로든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고 말했다.

특히 대기업의 진출과 함께 영화에 기획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소재나 모티브가 비슷한 사례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또다른 관계자는 " '접속' 처럼 우연히 소재가 일치한 경우조차 관객들의 의심을 살 만큼 우리 영화가 일본영화를 모방한다는 통념은 이미 만들어졌다.

이는 지금까지 영화를 만들어온 창작자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통념을 깨기 위해서는 정말 독창적인 작품들이 나와야 한다.

기획력의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면서 일본영화와의 시비가 유난히 많은 점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이 볼 수없기 때문에 쉽게 모방할 위험성이 많은 만큼 일본영화를 개방하기 전에는 해결되기 힘들 것" 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편지' 를 기획한 신씨네의 제작자 신철씨는 "한국영화를 만드는 실력이 부족한 점을 솔직히 인정한다.

최근 잘 만든 일본영화들을 보면서 큰일났다는 생각도 했다.

요즘엔 워낙 시비가 많아 기획자들이 되도록 비슷한 소재나 장면들은 피하려고 한다" 고 말했다.

이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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